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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성경묵상

잠언(Proverbs)1:20-33(지혜의 부름과 경고)

by 미류맘 2021.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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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여인이 사람들이 많은 광장에서 소리 높여 어리석은 사람들을 향하여 경고합니다. 지혜의 부름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최후는 결국 '안일한 태만'으로 인한 재앙과 사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귀 기울이는 사람에게는 안전과 평안이 보장됩니다.

 

오늘 QT부분은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외국 성경해설 사이트(sermonwriter.com/)에 해설이 있습니다. 참고하면서 정리하려고 합니다.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1:1)"로 시작되는 잠언은 8개로 구성됩니다. 

1-9 (솔로몬)
10:1 – 22:16 (솔로몬)
22:17 – 24:22 (저자 미상)
24:23-34 (현인의 글)
25-29 (솔로몬)
30 (지혜자 아굴)
31:1-9 (지혜자 르무엘)
31:10-31 (저자 미상)

흥미로운 것은 잠언의 형식입니다. 히브리 시는 대구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잠언이 이 형식을 따릅니다. 대표적인 세 가지 형식은 다음과 같습니다(자료 참조: 라이프성경사전)

  1. 두 행(行)의 차이점을 대비시켜 극명하게 대조(contrasting)시키는 형식
    대개 ‘그러나’(but)라는 접속어를 사용하거나 함축. 예)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15:6)
  2. 두 행의 유사점을 비교(comparing)하여 강조하는 형식
    ‘···처럼’(like), ‘···보다 더’(better than)란 의미를 함축. 예)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10:26)
  3. 부연 설명하여 앞의 행(行)을 보충 내지 보완(complementing)하는 형식
    ‘그리고’(and)라는 표현이나 의미가 함축. 예)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10:22)

1장은 지혜와 어리석음을 대조하고 각각의 결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장-9장에서 지혜는 여자로 의인화됩니다. 가부장적인 고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권위로 말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약간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2-7장에서 지혜(wisdom)는 '어리석은 여자(foolish woman)'이나 '창녀(adulteress)'의 반대로 표현됩니다. 

지혜의 여인(Lady Wisdom)은 '바른 생활과 죄악(right living vs. sinfulness)'이 아니라 '지혜와 어리석음(wisdom vs. foolishness)'에 대하여 말합니다. 잠언의 지혜의 여인과 신명기 작가와 예언자들은 우리 모두가 죄악의 길 대신 옳은 길을 선택하도록 올바른 삶과 죄악의 삶의 결과를 설명합니다. 

솔로몬은 잠언을 시작하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잠 1:7)이라고 조언하고, 지혜의 여인은 '(어리석은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였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택하지 않았다'(잠 1:29)라고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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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Wisdom calls aloud in the street. She utters her voice in the public squares.
21.  She calls at the head of noisy places. At the entrance of the city gates, she utters her words:

지혜가 부른다

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21.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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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절 "20. 지혜가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부르며, 광장에서 그 소리를 높인다. 21. 시끄러운 길 머리에서 소리치고, 성문 입구에서 그 소리를 전한다."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지혜는 여인으로 의인화되어 20절 지혜의 여인이 거리에서 소리를 높여 부릅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거리, 시장, 골목, 성문 입구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찾습니다. 특히 구약시대에 성문은 매우 번잡한 곳이었습니다. 성읍을 드나드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낮에는 일하러 밭으로 가고 밤에는 성문을 통해 돌아왔습니다. 성문에서 장로들은 재판을 했고, 예언자들은 예언을 했고, 상인들은 장사를 했습니다. 

지혜는 그러한 성문에서 소리 높여 탄원을 합니다. 그녀는 어리석은 자들이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혜를 선택하기를 호소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혜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그들이 지혜를 선택한다면 그들의 불행한 상황은 역전될 것을 지혜의 여인은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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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How long, you simple ones, will you love simplicity? How long will mockers delight themselves in mockery, and fools hate knowledge?
23.  Turn at my reproof. Behold, I will pour out my spirit on you. I will make known my words to you.

22.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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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3절 "22. 너희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리석음을 좋아할 것이냐? 비웃는 자들은 언제까지 비웃음을 기뻐하며, 어리석은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겠느냐? 23. 나의 책망에 뒤를 돌아보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들을 너희가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지혜의 여인은 어리석은 자, 비웃는 자들을 향해 외칩니다: '지혜의 책망을 듣고 뒤를 돌아보라!' 그녀가 부르짖는 대상은 단순한 자, 어리석은 자, 순진한 자, 통찰력이 부족한 자, 비웃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의인(the righteous),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God-fearing person)의 반대말입니다. 시편의 시인은 '의인이 그들의 원수들에게 비방거리와 조롱거리가 되었다'라고 자주 불평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지혜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리석음을 좋아하고 지식을 미워한다고 말합니다. 이 책의 목적은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1:4)"라고 잠언은 기록하면서 시작했지요? 왜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식을 미워할까요? 한 외국의 성경학자는 말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지식과 '하나님을 경외함'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고 느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한 제약을 분개한다. 그들은 그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원한다... 그들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6) 그러나 책임 없는 삶, 결과 없는 삶이란 없다.

지혜의 여인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향해 다시 '자신의 영을 그들에게 쏟겠다'라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지혜의 말에 대부분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듣는 것 같아도 계속해서 어리석은 행동을 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돕는 것은 절망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능장애인들과 함께 일하는 목사님의 경우 이런 종류의 좌절감을 경험하기 때문에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만 이따금 성공할 경우에 힘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는 지혜의 여인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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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Because I have called, and you have refused; I have stretched out my hand, and no one has paid attention;
25.  but you have ignored all my counsel, and wanted none of my reproof;

24.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25.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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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5절 "24. 내가 불렀으나 너희는 거부하였고, 내가 손을 펼쳤으나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25. 오히려 너희는 나의 모든 충고를 무시하고 나의 책망을 원치 않았다." 

지혜는 어리석은 자들을 향해 말합니다: '나 지혜는 너희를 불렀으나 너희는 나를 거절했다.' 단순한 자들은 지혜(깨달음)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비웃는 자들은 비웃음을 내려놓고 믿음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로워 지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불행한 길에 서 있지만 그 길은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지혜는 그들이 돌아오도록(지혜를 선택하도록) 손을 펼쳤으나 그들은 거부했습니다. Sermon Writer의 한 학자는 말합니다. 

또 다른 가정은 지혜 부인의 조언에 대답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실패가 그 안에 그들의 파괴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리석은 백성의 어리석음을 벌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지혜는 곧 판결을 내릴 것을 경고하지 않는다. 행동에는 결과가 있고, 어리석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고통을 겪을 수 있다. 어리석은 선택에는 내재된 처벌이 따른다. 여기에 그려진 것은 하늘의 왕좌에서 판단을 내리는 하느님이라기보다는 중력의 법칙과 같은 물리적 법칙에 가깝다. 누군가가 중력의 법칙을 깨뜨릴 수는 없지만, 그것을 무시해야만 자신을 깨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가 어리석은 사람들과 함께 있다.

철학적인(또는 물리적인) 문제로 읽히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지혜의 부름에 응하지 못한 것은 그들 안에 내재된 문제가 있다는 이해가 쉽지 않은 설명입니다. 그러면 이 순간에 어리석은 사람들이 지혜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면, 너무 늦은 것인지? 아직 마지막 기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혜는 화가 나 있지만 길거리에서 크게 부르짖고(20절),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23절). 아직 돌이킬 기회가 있다는 신호입니다. 같은 학자의 설명을 정리합니다. 

"지혜는 하나님이 우리를 저버리지 않고 기다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우리가 더 나은 방법을 선택하기를 원하며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을 여전히 바라고 있다. 지혜를 향한 문이 영원히 닫혔다고 통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이 곧 닫힐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누군가가 그녀의 부름을 듣고 대답하기를 바라면서, 손을 펴서 그녀의 지혜로운 조언을 경청하고 질책을 귀담아 듣기를 그녀는 아직 희망하고 있다. 그녀는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설명에서 볼 때 '지혜'는 바로 '하나님, 우리의 예수님'입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지혜를 구할 수 있고, 지혜를 얻을 수 있고, 그리고 지혜롭게 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백성을 슬기롭게 이끌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지혜, 어리석음 중 어떤 손짓과 부름에 이끌렸을까요? 실수로 어리석음의 길을 선택했다면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지혜의 여인이 아직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신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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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I also will laugh at your disaster. I will mock when calamity overtakes you;
27.  when calamity overtakes you like a storm, when your disaster comes on like a whirlwind; when distress and anguish come on you.

26.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27.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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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7절 "26. 너희의 재앙에 내가 웃을 것이고, 재앙이 너희에게 덮칠 때에 내가 비웃을 것이다. 27. 재앙이 폭풍처럼 너희를 덮치고, 너희의 재앙이 태풍처럼 내리고, 슬픔과 고통이 너희에게 임할 때에"

지혜는 '너희의 재앙에 내가 웃을 것'을 경고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불타오르는 불, 질투하시는 하나님'(신 4:24)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불성실의 결과를 경고합니다. 그러나 아직 구원의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버리고 멸하지 않으실 것'(신 4:30-31)이기 때문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신 4:24)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신 4:30-31)

지혜는 기회에 대한 희망과 경고를 동시에 주고 있습니다. 곧 닥칠 재앙은 그 자체로 끝이고, 탈출구가 없어 보이는 계속되는 진행중인 재앙입니다. 지혜는 재앙과 슬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하면서 그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그냥 보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혜의 눈에서 눈물을 볼 수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본다면 지혜(하나님)는 어리석은 자들의 고통에 그저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올바른 결과(악에 대한 선의 승리)에 기뻐할 것이라는 해설입니다. 가혹한 이야기이나 사실입니다.

도시 어디인가 흡연자 골목에 모인 젊은이들, 가방에 술병을 넣은 채 도심을 방황하는 주정뱅이들, 완전히 틀어진 요즘의 경제 - 특히 요즘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정체불명의 코로나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놀라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라고 물으면서 우리는 그들을(아니 스스로를) 비웃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즐거운 웃음은 아니고 실연의 웃음입니다. 울지 않는 것은 웃음입니다. 그들이 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에게 계속 경고의 비웃음을 보이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우리들을 향한 사랑, 자비, 연민이 깔려 있습니다. 어리석은 우리들은 계속해서 지혜(하나님)의 제안을 거부해 왔고,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택으로 고통받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끝일까요? 아니면 지혜를 붙잡기 위해 탈출할 출구가 아직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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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Then will they call on me, but I will not answer. They will seek me diligently, but they will not find me;
29.  because they hated knowledge, and didn’t choose the fear of Yahweh.
30.  They wanted none of my counsel. They despised all my reproof.
31.  Therefore they will eat of the fruit of their own way, and be filled with their own schemes.

28.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29.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30.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31.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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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1절 "28.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겠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저들이 나를 급히 찾아도 나를 찾지 못할 것이다. 29. 이는 그들이 지식을 미워하였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0. 그들이 내 충고를 원하지 않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무시하였다. 31.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이 뿌린 열매를 먹을 것이며, 자신의 계략으로 배부를 것이다."

앞에서 지혜는 그들을 불렀으니 그들은 거절했다(24절), 그러나 이제 그들이 지혜를 부르겠으나, 지혜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28절). 지혜는 손을 펼쳤으나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24절). 오히려 그들은 지혜의 모든 충고를 무시하고 지혜의 책망을 원치 않았다(25절). 이제 늦게 그들이 지혜를 급히 찾아도 찾지 못할 것이다(28절). 

그 이유를 지혜는 설명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이 지식을 미워하였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9절). 결국 지혜의 여인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결국 '지혜=하나님'이라는 공식입니다. 회개, 죄사함, 용서의 기회는 아직 있을까요?

지혜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이 뿌린 열매를 먹을 것이며, 자신의 계략으로 배부를 것이다(31절).' 지혜(하나님)는 그들에게 썩은 열매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스스로 뿌린 열매(죄의 결과물)를 먹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스스로 판 무덤에 갇히게 된다는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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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For the backsliding of the simple will kill them. The careless ease of fools will destroy them.
33.  But whoever listens to me will dwell securely, and will be at ease, without fear of harm.”

32.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33.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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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3절 "32. 어리석은 자들의 등돌림은 자신을 죽일 것이고, 미련한 사람의 안일한 태만은 자신을 멸망시킬 것이나, 33.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안전하게 살 것이고, 재앙의 두려움 없이 평안할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앞에서 설명한 '대구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과 지혜(하나님)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운명을 대조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죽음과 멸망이(32절), 지혜의 말을 경청하는 자들에게는 안전과 재앙의 두려움 없는 평안(33절)이 있을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의 '안일한 태만(careless ease:  Sal·wah)'은 자신을 멸망시킬 것(32절)입니다.  Sal·wah는 '안전, 번역, 고요'를 의미하는데 '안일함, 불안감 부족, 지나친 안일함 또는 무관심'을 의미합니다. 이런 식의 안일함은 종종 재난의 서막으로 우리로 하여금 위험이나 잠재적 결과를 인정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어리석은 자는 아무도 그들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재앙의 씨앗은 그들의 어리석은 선택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33절 지혜는 말합니다.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안전하게 살 것이고, 재앙의 두려움 없이 평안할 것이다. 여기에서 '귀 기울이다(listen to)'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신체적으로 기계적으로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잘 듣고, 이해하고, 깨닫고, 그리고 행동(지혜로운 선택=하나님 경외)으로 옮기란 뜻입니다. 

이틀 전 새벽 산책을 하다가 비가 오는데 발견한 달팽이 한 마리. 달팽이는 두 쌍의 더듬이가 있는데 하나는 시각을 하나는 후각을 담당한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 공부를 하니 이 녀석 생각이 납니다. 우리에게도 두 쌍의 더듬이가 있다면 하나는 '지혜' 다른 하나는 '어리석음'의 더듬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달팽이가 더듬이로 시각과 후각을 담당하듯 우리는 마음의 더듬이로 지혜와 어리석을 사이를 방황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에게 주어진 더듬이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달팽이에게 청각이 없는데 미리 알았으면 숲으로 이동시킬 걸 후회됩니다. 산책로에서 기어 다니던 녀석이 눈에 발힙니다. 발견하고 신기해서 사진 찍어서 정신없이 자고 있을 저희 딸 미류에게 '꼬물거리는 꼴이 완전히 너다~'하고 카톡으로 보냈습니다. 돌아와서 봤나 물으니 묻습니다. '내가 이렇게 징그러워?'

아이러니한 것은 어리석은 자의 '안일한 태만'입니다. 왜 어리석은 자들이 편안하게 안일한 삶을 즐길 수 있을까요? 그들은 청각이 없는 잘 듣지 못하는 달팽이처럼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 무시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즐기는 현재의 안락함에 빠져서 그들은 편안하다고 느낄 수 있으나 그들은 어디인지도 모르고 산책로로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그들을 기다리는 재앙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안전하게 살 것이고, 재앙의 두려움 없이 평안할 것(33절)'입니다. 

잠언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 대상인 것 같습니다. 몇 줄 되지 않은 구절을 생각하고, 내용을 찾고, 요약하고, 나의 케이스와 매칭시키는 일이 힘들지만,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지혜와 하나님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오늘 QT 어제 오전에 시작해서, 어떤 일을 할 지 방황하다가, 정리하는데 하루가 걸렸습니다. 어제 못 간 새벽 산책 다녀오고 오늘 전쟁에 준비하려고 합니다.

요즘 계속해서 저희 아이와의 조용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엄마이자 교사가 되어야 할 저는 초저녁에 불안해서 수면제 먹고 자고 새벽 1시에 일어나니 이번에는 아이가 늦은 잠을 자기 시작합니다. 힘든 상황에서 저도 지혜의 더듬이를 활용해야 하는데, 어떻게 사용할 지를 몰라 방황하다가 잠이라는 '안일한 태만'으로 현실 도피를 했네요. 행동이 없는 안일함 안으로의 도피였습니다. 두려움으로부터의 도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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