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이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이라고 요한은 말하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대언자 예수님의 사랑 실천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삶이고, 사랑이 그 근본임을 강조합니다.
요한일서 2:1a. 편지를 쓰는 목적
1a. My little children, these things I write to you, that you may not sin.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1a.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개인번역) 1a. 나의 자녀들아,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것을 쓰는 것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 (1a절): 앞에서 요한은 1.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2. 우리 죄를 고백하면, 3.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면 (8-10절) - 세 가지의 상황과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이 글을 쓰는 이유를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선언합니다.
요한일서 2:1b-2. 대언자 예수
1b. And if anyone sins, we have an Advocate with the Father, Jesus Christ the righteous.
2. And He Himself is the propitiation for our sins, and not for ours only but also for the whole world.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개인번역) 1b. 그리고 누군가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시니, 우리의 죄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대언자가 있으니 (1b절):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기를 바라시나, 우리가 죄를 범할 경우 우리에게 변호인이신 예수님이 계시다고 말합니다. 하늘 법정에서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관이시고, 우리가 죄인의 혐의를 받고 피고인으로 서 있고, 사탄이 우리를 고발한 자이고, 예수님이 변호사인 상황을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학자는 그 상황에서 우리는 죄인임을 아신 재판장 하나님은 사망 선고를 내리셨고, 우리의 죄를 고발한 사탄은 그 상황을 즐기고 있고, 예수님은 우리를 대변하기 위게 발언권을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았고, 이를 인정한 재판관이신 하나님은 벌금은 아들이신 예수님이 완납했다고 확인하면서 그 상황은 종료되고, 그 사건을 예수님에게 넘깁니다. 죄인의 운명은 이제 대언자이신 예수님의 판단에 달려있습니다. 실제의 상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죄와의 전쟁은 우리 인간이 타고난 운명이고, 보혜사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이로 우리는 지속적으로 죄를 짓고 또 회개하고, 예수님은 다시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죄는 계속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매일 영적인 전쟁터에서 죄와의 싸움을 하도록 운명 지어진 것은 아닐까요?
요한일서 2:3-6. 하나님을 아는 삶이란?
3. Now by this we know that we know Him, if we keep His commandments.
4. He who says, “I know Him,” and does not keep His commandments, is a liar, and the truth is not in him.
5. But whoever keeps His word, truly the love of God is perfected in him. By this we know that we are in Him.
6. He who says he abides in Him ought himself also to walk just as He walked.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개인번역) 3. 이제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4. "나는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며, 진리가 그 속에 없습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완성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사신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3절): 요한이 말하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4절): 입으로는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과 교제가 있다!'라고 말하고 행동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저짓말을 하는 사람은 그 속에 진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5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 진리가 있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즉,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것 = 사랑, 순종 = 우리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학자는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면 그와 죄와의 관계가 바뀐다고 말합니다. 즉, 그는:
- 더 이상 예전처럼 죄를 사랑하지 않는다.
-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의 죄를 자랑하지 않는다.
- 더 이상 예전처럼 죄를 짓지 않는다.
-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의 죄를 애틋하게 기억하지 않는다.
- 예전처럼 자신의 죄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 예전처럼 상습적인 죄악에 더 이상 편안하지 않다.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죄악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그대로 있지만 죄와의 관계가 바뀌기 때문에 죄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죄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죄를 사랑하지도 자랑하지도 기억하지도 않고 - 가장 중요한 것은 예전처럼 죄에 빠지지 않고 죄와 영적 전쟁을 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사신 것 처럼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6절):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가 있고, 그 안에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입으로만 말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실천하신 순종과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 당연한 일이고 단순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닮은 삶을 산다는 것은 많은 고난이 있는 삶임에 틀림없습니다. 학자는 요점을 정리합니다:
"여기서 요점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점점 더 의로운 삶을 살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 뜻은 그 사람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내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즉 그가 점점 더 죄에 불만을 품고 괴로워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Boice)
요한일서 2:7-11. 형제를 사랑하라!
7. Brethren, I write no new commandment to you, but an old commandment which you have had from the beginning. The old commandment is the word which you heard from the beginning.
8. Again, a new commandment I write to you, which thing is true in Him and in you, because the darkness is passing away, and the true light is already shining.
9. He who says he is in the light, and hates his brother, is in darkness until now.
10. He who loves his brother abides in the light, and there is no cause for stumbling in him. But he who hates his brother is in darkness and walks in darkness, and does not know where he is going, because the darkness has blinded his eyes.
옛 계명과 새 계명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개인번역) 7.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옛 계명이며, 그 옛 계명은 여러분이 이미 들었던 말씀입니다. 8. 나는 다시 여러분에게 쓰는 새 계명은 그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참된 것입니다.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이미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9.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10. 그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머물러 있어 그 안에 넘어짐이 없습니다. 11.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에서 살면서,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여러분에게 쓰는 새 계명은 (7-8절): 새 계명과 옛 계명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는 뜻일까요? 학자는 설명합니다.
요한이 쓴 계명은 옛 계명(기독교인의 삶 전체를 형제들에게 설교했다는 의미에서)과 새 계명(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예수에 의해 새 계명으로 불렸다는 의미에서)이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사랑을 네 방향으로 보여준다:
- 모든 인류를 포용할 만큼 충분히 넓다.
- 영원히 지속될 만큼 충분히 길다.
- 가장 죄 많은 죄인에게 닿을 정도로 깊다.
-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갈 만큼 높다.
이것은 새로운 사랑이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일 이전에는 세상이 실제로 보지 못했던 사랑이다.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9절): 요한이 말하는 '빛 가운데서 걷는 것'은 형제 사랑이 필수입니다. 관계 속에서의 교제는 우선 같은 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10절), 빛 가운데에 있어서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에서 살면서 (11a절): 앞과는 반대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을 걷는 것이며,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어둠 속에서 비틀거립니다. 모든 행동의 핵심은 '사랑 실천'입니다. 성도들 간에 사랑 안에서 하나되고 사랑 안에서 친목하여야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요한이 말하는 형제란 이웃과도 같은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형제(또는 이웃) 사랑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더라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입니다 (11b절):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가다가 길을 헤매고 결국 넘어질 것입니다.
요한의 이 편지는 알쏭달쏭합니다. 알기도 할 것 같다가도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쓰는 말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기반을 둔 것이고 그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관계가 있습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일까요? 증오는 때때로 무관심으로도 표현됩니다. 이는 미움보다도 더 무서운 감정입니다. 우리에게 무관심한 대상은 누구이며 무엇일까요?
BIBLIOGRAPHY:
https://enduringword.com/bible-commentary/1-john-2/
개역개정 아래의 볼드체 성경구절은 NKJV 영어성경에 기반한 저의 개인 번역입니다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구절 위 코멘트 중 존칭어의 텍스트는 저의 개인 멘트이고, 청색 텍스트의 반어체는 인용, 번역 및 수정문구입니다.
인용 중 재인용은 이탤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예: 성경, 외국 학자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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