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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성경묵상

잠언(Proverbs)29:15-27(안전한 길을 가라)

by 미류맘 2021.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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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솔로몬 잠언집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채찍과 꾸지람의 지혜, 악인과 의인, 자녀 징계, 묵시와 율법, 종과 말, 말의 조급함, 종의 양육, 노함과 분함, 교만과 겸손, 도둑의 동업자, 사람의 두려움, 참 주권자, 의인과 악인의 미움에 대한 교훈이 대비되며 계속됩니다.

 

15.  The rod of correction gives wisdom, but a child left to himself causes shame to his mother.
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15. 교정의 매는 지혜를 주나, 멋대로 버린 자식은 그 어머니를 부끄럽게 한다."

자녀를 훈계할 때 체벌의 필요성을 말합니다. 요즘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체벌이 사라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체벌은 필요하다고 잠언은 여러 곳에서 이 점을 지적합니다. 인간 본성이 원래 어리석고 교만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 죄성은 늘 끄집어내서 죽이고 죽여도 오뚝이처럼 또 일어나고 살아나서 사방을 돌아다닙니다.

"매를 아끼는 사람은 자기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나,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부지런히 자식을 훈계한다" (잠 13:24)
"아이의 마음에는 어리석음이 얽혀 있으니, 훈계의 매가 아이로부터 그것을 멀리 쫓을 것이다." (잠 22:15)
"아이를 훈계하는 것을 아끼지 마라. 네가 매로 아이를 벌하여도,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를 매로 처벌하여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라." (잠 23:13-14)

그래서 교훈이 훈계가 책망이, 질책이, 교정의 매가 필요합니다. 너도 어른의 입장으로 하나님의 체벌의 대상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개정개역)'은 '스스로의 잣대로 판단하도록 멋대로 버린 자식'을 의미합니다.

아래는 외국의 한 성경학자의 말인데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훈육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부모는 자식들에게 훈육을 분배하는 자판기이다. 교정을 먼저 시도하고, 성공한다면 매를 아끼라. 그렇지 않다면 매를 작동시켜라 (
Discipline is the order of God’s government. Parents are his dispensers of it to their children. Let correction be first tried, and if it succeeds, let the rod be spared. If not, let the rod do its work.”: Bridges).

훈육은 하나님이 만드신 명령이고, 부모의 역할을 우리가 늘 보는 커피자판기와 같이 그 명령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우선 매를 아끼고 말로 훈계하고, 그것이 먹히지 않으면 매를 들어라.  매를 너무 아껴서 훈육이 되지 않은 자녀는 길들여지지 않은 '고삐풀린 망아지'와도 같아, 애정교육을 받지 못한 그런 자식은 부모의 수치심이 됩니다. 

며칠 전 전철에서 우연히 읽은 글 하나. 정확한 글귀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 '어떠한 경우라도 자녀체벌은 필요없다(안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랑의 매'라는 말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는데... 솔로몬의 훈육에 대한 교훈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대화밖에는 답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저도 어제 아이와 대화하려다가 대화를 엄마가 기피한다는 핀잔만 계속 받았습니다. 또 결론이 없는 답답한 대화로 끝났습니다. 아이에게 엄마은 존재는 늘 문제에서 도망가는 사람. 난감하면 대답을 회피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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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When the wicked increase, sin increases; but the righteous will see their downfall.
16.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

"16. 악인이 많아지면 범죄도 늘어나니, 의인은 그들이 망하는 것을 볼 것이다."

앞의 13절에서 "가난한 사람과 압제자가 다 함께 살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들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신다" 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압제자 모두 하나님께서 같이 창조하신 것처럼 세상에 악인과 의인을 같이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의인과 악인은 세상이라는 한 공간에서 섞여 살아야 하는 운명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악인이 많아지면 당연히 이 세상의 범죄도 늘어납니다. 한 외국학자는 '악의 증식에는 곱셉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말합니다. 악한 사람들의 수가 두 배가 되면 범죄 행위는 4-5배로 늘어나는 것 같다는 설명입니다. 그 말은 악인 하나가 전파하는 범죄의 수가 예상 외로 많다는 뜻일 것입니다.

범죄는 흐르는 물처럼 사방에 퍼지는 세균처럼 번식합니다. 그 뿌리를 뽑으려면 우리 인간의 마음의 밭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바로 겸손, 순종, 양보의 씨앗, 그리고 이전의 교만, 불손종, 탐욕의 잡초를 제거할 강력한 새 싹을 틔우도록, 하나님의 지혜의 씨앗으로 밭을 재정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불법과 불의가 아닌 의로움이라는 씨가 싹트는 희망의 밭으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의인은 겉으로는 약하나 속으로는 강합니다. 앞에서 외국의 학자가 말한 '부모는 주님의 훈육을 분배하는 자판기'란 말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악인과 의인이 같이 공생하도록 같이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악인을 제거하도록 의인을 '의로움을 찍어서 분배하는 자판기'로 만드셨습니다. 죄악이 번식하듯 의로움은 성장하고 영적 전파력을 가집니다. 의인의 수가 두 배가 되면 의로운 행위는 열 배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인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악인이 멸망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시편의 시인은 노래합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 1:6)
"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시 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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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Correct your son, and he will give you peace; yes, he will bring delight to your soul.
17.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17. 너의 자식을 징계하라. 그러면 그가 너에게 평안을 주고, 그가 네 마음에 기쁨을 줄 것이다."

앞에서도 많은 잠언들이 우리 자녀의 교정과 훈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을 방치하거나 친구들이나 주변의 문화에 맡기고 그들을 교정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지속적인 문제와 다툼의 근원이 되어 우리에게 평안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물질적 매 대신 말로 징계하는 훈육의 매를 들어야 합니다. 늘 자녀들의 문제로 영혼의 평안을 찾지 못하는 무모는 어떠한 방식이든 훈육의 매를 통하여 자녀를 교정하고, 그 교정을 통해 우리 자녀에게 회복과 성장의 발판을 제공하고, 그를 통해 우리는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잠언은 자녀를 향한 훈계의 교훈을 주었습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어리석음이 얽혀 있으니, 훈계의 매가 아이로부터 그것을 멀리 쫓을 것이다." (잠 22:15)
"아이를 훈계하는 것을 아끼지 마라. 네가 매로 아이를 벌하여도,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를 매로 처벌하여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라." (잠 23:13-14)
"교정의 매는 지혜를 주나, 멋대로 버린 자식은 그 어머니를 부끄럽게 한다." (잠 29:15)

따라서 잠언은 지혜로운 아들과 어리석은 아들이 부모에게 주는 영향에 대하여 말합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지만, 어리석은 아들은 어머니의 근심이다." (잠 10:1)
"의인의 아버지는 크게 기뻐할 것이고, 지혜로운 자식을 둔 아버지는 그로 인해 즐거워할 것이다." (잠 23:24)
"어리석은 아들은 그 아버지의 근심이 되고, 그를 낳은 어머니의 고통이다." (잠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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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Where there is no revelation, the people cast off restraint; but one who keeps the law is blessed.
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18. 계시가 없으면 백성이 제멋대로 날뛰지만,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

 계시가 없으면 백성이 제멋대로 날뛰지만,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 (잠 29:18), 이미지 소스: https://livingforjesus.com/

여기에서 '묵시(revelation)'란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를 말합니다. 영어번역은 '예언적 비전(prophetic vision: ESV/KJV)'으로 번역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은 히브리 예언자들과 그 후에 신약성경에서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부될 때 백성들은 '방자히 행하였다(개역개정)' 기록합니다. 영어성경은 백성의 행동을 '구속을 버렸다(cast off restraint: NIV/ESV)', '미쳐 날뛰었다(run wild: CSB)'로 번역합니다. 출애굽기도 기록합니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running wild)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출 32:25)

예를 들어 통일된 국가 조직을 갖추기 전 사사 시대에는 그들은 자신의 감정이나 각자의 의견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백성은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처신하였고 타락하고 범죄하고 우상숭배가 성행하였습니다. 위에 기록된 모세의 대변자 아론도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백성을 방탕에 빠지게 해서 그들을 방자하게 하였습니다.

사사기는 기록합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그 당시에 백성은 아무런 제약도 규제도 없이 자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는 삶의 반대는 율법을 지키는 삶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행복과 만족이 있습니다. 한 성경학자는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주인이자 창조주가 지혜롭고 축복받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지침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규제 안에 있는 것이지 억압적인 의미는 아니다. 어리석은 자만이 모든 구속이 억압적이라고 생각한다."
"In this sense, the Bible is something like a guide given to us by our owner and creator, telling us how to live a wise and blessed life. It is within restraint, but not in an oppressive sense. Only a fool thinks that all restraint is oppressive. "(Poole)

율법의 말씀이 적혀있는 성경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은 Poole은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율적으로 '규제'를 하는 것이지 강제성이 있는 '억압'이 아니라는 설명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단순히 받아들이고 듣고 읽는 것으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고 실천해야 구원으로 이르게 됩니다. 다른 말로, 교회만 간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삶에서 실천해야 구원으로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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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A servant can’t be corrected by words. Though he understands, yet he will not respond. 
19.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따르지 아니함이니라

"19. 종은 말로만 교정될 수 없다. 알아듣고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주종(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계약상의 '갑'과 '을'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왜 종은 말로는 교정이 되지 않을까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자부심, 교만, 오만 때문입니다. 그 아집은 자신을 주장하고 주인을 거부하고, 그 결과는 불복종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말이 통하지 않으면 자식이 자녀에게 사랑의 매를 들 때와 장소가 있듯 책망과 벌이 필요합니다. 버거운 삶의 경험과 단련이 그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일방적인 명령과 복종은 모욕적일 수 있습니다. 권위있는 주인의 말을 들어야 하고 때로는 매도 맞아야 합니다. 그러나 시대와 분야를 막론하고 지혜로운 주인을 모신다면 훈계도 매도 달게 받아야 하는 종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징계와 훈계를 통해서 종은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종의 입장에서 주인의 말씀을 듣고 이해는 하지만 따르지(응답하지)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것은 정신적이나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해는 하지만(못 알아들은 척하고) 응답하고 지혜를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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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Do you see a man who is hasty in his words? There is more hope for a fool than for him.
20.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20. 말로만 성급한 사람을 보았느냐? 그보다 오히려 어리석은 자에게 희망이 더 있다."

잠언은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말하는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들은 말로만 성급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바보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어리석은 자에게 희망이 더 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즉 지혜가 없고 말을 충동적으로 내뱉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보다 더 희망이 없는 바보 중의 바보입니다. 

조급한 마음이 충동적인 말로 나타납니다. 말 하기 전에 다시 생각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말의 중요성을 잠언은 여러 곳에서 인용합니다 (잠언에 대한 다른 말씀 인용은 http://www.oldfaith.net/의 김효성 목사님의 '잠언 강해' 참고, 번역은 여러 영문번역을 비교해서 한 저의 번역본).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조절하는 자는 지혜롭다." (잠 10:19)
"칼로 찌르는 것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으나, 지혜로운 자의 혀는 치유를 가져온다." (잠 12:18)
"듣기 전에 대답하는 사람은 어리석어서 수치를 당한다." (잠 18:13)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헤아려보나, 악인의 입은 악을 쏟아낸다." (잠 15:28)
"말을 아끼는 사람은 지식이 있고, 감정을 잘 조절하는 사람은 깨달음이 있다." (잠 17:27)

말은 마음의 표현이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 전에 상대방을 고려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말이 전달할 메시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말을 하기 전에 내 안에 있는 지혜에게 물어야 합니다. '이 말을 해도 되는지?' 한번 나온 말은 주어 담기가 불가능합니다. 요즘 말을 글로 써서 SNS에 올린 후 후회하고 삭제해도 네티즌들이 그 올린 글을 캡처해서 온라인에 배포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우리는 말뿐 아니라 글도 한번 쓰면 삭제가 불가능한 시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말에 대한 사자성어를 찾아보았는데 1,515개를 올린 페이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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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He who pampers his servant from youth will have him become a son in the end.
21.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리라

"21. 어렸을 때부터 종의 응석을 받아주면, 나중에는 자식인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위의 19절에서도 주인과 종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종은 말로만 교정될 수 없다. 알아듣고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19절)" 자신의 종에게 지나치게 부드럽고 관대한 주인에 대한 말입니다. 그는 종을 위하여 편하고 즐거운 삶을 만들어 주려고 많은 걱정을 합니다. 종에게 사랑과 두려움을 같이 받으려면 두 가지를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하나, 잘 선택했는가? , 잘 사용하는가? (Trapp). 

잘 선택했지만 잘 사용하지 못하고 오용(misuse)했다면 그 주인은 자격이 없다는 설명입니다. 너무 우대해 주면 나중에는 주인행세를 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종이 주인에게 다른 의무와 유산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주인의 자식처럼 행동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주인과의 관계를 남용하는 악한 종은 '오만'을 선한 종은 '헌신'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주인의 입장에서 종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러나 종의 입장에서 아들처럼 교만, 불복종, 욕심의 마음으로 아들로서의 권리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종된 입장에서 우리는 겸손, 순종, 감사의 마음으로 종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자녀처럼 칭찬과 격려, 그리고 훈육과 지혜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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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An angry man stirs up strife, and a wrathful man abounds in sin.
22.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22.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기를 잘하는 자는 죄를 많이 짓게 된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자신의 분노로 인한 다툼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합니다. 마음 속에 평화가 부족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자신의 내적 갈등을 쉽게 떠넘깁니다. 그리고 분노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자제력이 결여되어 있고 그로 인한 다툼은 범행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잠언에서 분노와 다툼과 어리석음과 지혜를 연결시켜 가르치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잠언 14:17은 분노와 어리석음을 "빨리 화를 내는 사람은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말합니다. 그리고 잠언 15:18은 분노와 다툼을 "분을 쉽게 내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킨다" 말합니다. 또한 잠언은 분노하기를 더디 하라고 조언합니다. 잠언 14:29는 "분노를 참는 사람은 매우 명철한 사람이다" 말합니다. 그리고 잠언 16:32에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다" 말하고 있습니다.

분노를 무조건 참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수위를 조절하고 말과 매를 아끼듯 분노도 아끼고 조절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조절이 어려우면 말씀대로 '분노하기를 더디 하여야' 합니다. 야고보는 '말씀의 들음과 행함'이라는 제목으로 기록합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야 1:19-20)

의로운 사람은 분노를 표출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분노하기를 천천히 합니다. 말하는 것이 '때와 장소'가 있듯, 분노하는 것도 때와 장소 그리고 수위가 있습니다. 분노의 수위를 스스로 조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천천히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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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A man’s pride brings him low, but one of lowly spirit gains honor.
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나,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을 것이다." 

Waktke는 히브리어로 번역된 "교만(pride)"은 '높다(to be high)'는 의미의 어근에서 파생되어 '낮다(lowly)'와 정확히 상반점을 이루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스스로를 '높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뿌리가 교만한 사람이고, 상대적으로 '낮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높음과 낮음, 교만과 겸손 - 이 상극어들을 비교하고, 의로움과 악함과 대비를 해 보면 '(스스로)낮음-겸손-의로움' vs. '(스스로)높음-교만-악함'으로 매칭이 되는데 실제 인격의 됨됨이는 '의로움-겸손-(인정되는)높음' vs. '악함-교만-(인정되는)낮음'의 순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높고 낮음의 시선이 누구의 것인가에 따라 인격의 됨됨이가 판단됩니다. 

그에 대한 설명이 뒷 부분입니다. '마음이 겸손하면 (타인의) 영예를 얻을 것이다.' 성경학자 Poole은 말합니다 "명예는 그림자처럼 그것을 쫓는 자들로부터 달아나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자들을 따라간다 (Thus honour, like a shadow, flees from them that pursue it, and follows them who flee from it)." 명예는 쫓는다가 얻는 것이 아니고 도망친다고 얻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또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God opposes the proud but gives grace to the humble)" (야 4:6) 앞에서 잠언도 '교만과 멸망', 그리고 '겸손과 영광'에 대한 조언을 하였습니다.

"진실로 주님은 조롱하는 자를 비웃으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잠 3:34)
"교만이 오면 수치가 오지만, 겸손에는 지혜가 있다." 
(잠 11:2)
"교만에는 멸망이 따르고,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으로 이어진다." 
(잠 16:18)
"사람의 마음이 오만하면 멸망이 뒤따르지만, 겸손하면 영광이 뒤따른다."
(잠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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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Whoever is an accomplice of a thief is an enemy of his own soul. He takes an oath, but dares not testify.
24.  도둑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저주를 들어도 진술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도둑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사람이다. 그는 맹세를 해도 증언하지 않을 것이다."

NASB: "One who is a partner with a thief hates his own life; He hears the oath but tells nothing." (도둑과 동범자는 자신의 삶을 미워한다. 그는 맹세를 듣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NLT: "If you assist a thief, you only hurt yourself. You are sworn to tell the truth, but you dare not testify." (도둑을 도우면 스스로를 해치게 된다. 진실을 말할 것을 맹세하나 증언하지는 않을 것이다.)
CSB: "To be a thief's partner is to hate oneself; he hears the curse but will not testify." (도둑의 동범이 되는 것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는 저주를 듣지만 감히 증언하지 않을 것이다.)

'도둑과 짝하는 자(개역개정)'은 영어번역으로 '도둑의 동범(partner: NASB/CSB)'으로도 번역합니다. 도둑과 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거부하고 어리석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훔치는 사람은 나의 것도 훔칠 것이고 목숨도 위협할 수 있습니다. 법률상으로 도둑과 공범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죄를 인정하고 장물을 받는 것은 죄와 벌에 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남의 것을 훔치는 도둑에 대한 말이나(십계명의 죄악 중 하나) 모든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을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잠언 16:8은 불의한 돈은 자신에게 화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공의롭고 살며 적은 소득이 불의하게 살며 많은 소득보다 낫다." 

도둑과 동범자는 자신의 불어난 식욕을 채우기 위해 도둑과 합류했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자신의 불어난 식욕으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런 자는 본문에서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개정개역)'라고 말하는데 영혼(soul)=생명(life)이고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입니다. 자신의 불어난 식욕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소중한 삶을 미워하는 자(love-appetite vs. hate-his own life). 사랑과 저주의 대상이 뒤바뀌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패러독스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진실을 말하겠다고 법정에서 거듭 맹세하지만 공범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밝히지 않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보다 악한 친구에 대한 충성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충성'이야기가 한 에피소드를 떠올립니다. 최근 정치에서 논란이 되는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조직에) 충성한다.'는 말을 네이버에 검색하니 윤xx을 존경한다는 글로 도배가 되어 있네요. 네이버 이용하지 말아야 다짐하면서 계속 사용하는 제가 싫습니다. 바로 다음으로 검색하니 결과가 거꾸로입니다. 국가 강아지 한 마리를 두고 조중동이 기쁨조로 한통속이 되어 날뛰는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느낌입니다. 그가 끌고 있는 애완견이 xx보고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라는 수사이슈의 멘트가 흥미롭습니다.

말이 옆으로 새었는데 우리가 '충성'해야 하는 대상은 사람도, 조직도 아닌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애시당초 없었습니다. 잠언은 8:22-26에서 "여호와께서 그의 일을 시작하실 때, 곧 태초에 나를 가지셨다. 영원 전,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에 내가 세움을 받았다... 하나님이 땅도, 들도, 세상의 먼지의 시작도 만들지 않으신 때였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창세기 1장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솔로몬의 잠언은 그 말씀이 '지혜의 말씀'임을 부연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요? 전에 8장을 공부하면서 올린 글 링크합니다. 

 

잠언(Proverbs)8:22-36(천지창조 이전의 지혜)

지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지혜는 하나님의 '장인'이었고 그를 사용하여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지혜를 도구로 인간을 만드셨고, 지혜를 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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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저주를 듣지만 감히 증언하지 않을 것이다(CSB)'의 번역의 뜻이 애매하여 한 외국의 성경학자의 설명을 첨부합니다. "증언을 요구하는 것은 실제로 증언을 하지 않을 사람에게 선언된 저주이다. 이 잠언은 맹세나 욕설의 단어로 사용하며 도둑과 친구가 되어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지만 증거를 제시하라는 요구를 들으면 침묵을 지키는 사람을 묘사한다. 그는 스스로에게 저주를 내린 격이다" (Garrett)

'맹세함을 듣고도 증언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가 벗한 도둑에 대해 아는 바를 고백하라는 요구의 말을 듣거나, 도둑과 동업을 한 자가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그는 '나는 모른다'는 주장을 일관하면서 도둑과의 관계를 고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양심은 식욕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차고, 이미 왜곡되고 뒤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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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The fear of man proves to be a snare, but whoever puts his trust in Yahweh is kept safe.
26.  Many seek the ruler’s favor, but a man’s justice comes from Yahweh.

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26.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25. 사람을 두려워하면 확실히 올무에 걸리지만,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할 것이다. "26. 많은 사람이 통치자의 환심을 사려 하나, 사람의 판결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확실히 올무에 걸리지만,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할 것이다 (잠 29:25, 이미지 소스: https://michaelsblog282.wordpress.com/)

마음은 선하지만 용기가 없는 많은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들은 우선 '하나님과 지혜가 말하는 것과 어떠한 온전함으로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신경을 쓰기 보다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너무 많이 걱정합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가두는 올무입이다.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내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고 묻게 됩니다. 그들의 조롱의 손가락을 대할 용기가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으로 얼룩진 사람들의 예로 사울, 아론, 그리고 베드로가 있습니다. 회심 이전의 바울이었던 사울은 기독교인들을 학대했고, 모세의 대변자였던 아론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백성을 방탕에 빠지게 했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의 무죄를 알았던 빌라도도 인간에 대한 두려움으로 구세주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두려워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강한 보살핌으로 안전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우리는 그러한 속박에서 풀려날 수 있습니다. 잠언 10:27은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지만, 악인의 수명은 짧아진다"라고 기록합니다  또한 잠언 12:2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선한 사람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지만 악을 꾀하는 사람은 책망하신다" 말합니다.

"자신을 믿고 목회자를 믿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는 자는 안전합니다. 예수의 피와 의로움을 믿는 사람이 늘 행복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그는 안전합니다. 그는 늘 노래하지 않을 수 있으나, 늘 완전한 확신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때로는 괴로울 수 있지만, 때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관심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그는 항상 안전합니다. (Spurgeon)"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돌아가는 단순한 진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나라의 통치자에게 혜택을 갈망합니다. 이 내용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됩니다. 앞 구절에서도 인간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나 하나님의 의지하면 안전하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통치자의 은혜를 의존하는 사람들은 통치자의 은혜를 두려움으로 구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판결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정의, 안보, 번영을 위해 인간에게 의존한다면 우리는 실망할 것입니다. 그러한 정의와 이익은 가장 힘센 세상의 통치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솔로몬은 말합니다. 통치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정의를 실행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인간의 제도는 인정하지만 모든 규율과 제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옴을 본문은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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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A dishonest man detests the righteous, and the upright in their ways detest the wicked.
27.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바르게 행하는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27. 불의한 사람은 의인의 미움을 받고, 행실이 바른 자는 악인의 미움을 받는다."

정의롭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의로움에 있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악인을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죄악에 대한 혐오감으로 바라봅니다. 마찬가지로 역으로 행실이 바른 자는 악인의 미움을 받습니다. 양쪽이 다 팩트입니다. 그들의 의로운 삶은 악인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질책입니다. 불의한 자(불의)와 바른 자(의로움)는 상호 배타적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한 길을 가도록 운명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벌 받을 성 예루살렘'과 '벌 받을 백성'을 말하면서, 그들이 '선한 길로 가지 아니하다' 기록합니다 (렘 6:16).  배경은 시드기야 왕 11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
"Stand at the crossroads and look; ask for the ancient paths, ask where the good way is, and walk in i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But you said, `We will not walk in it.'"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교차로에서 멈추어 서서 보라. (너희 조상들이 걸었던) 옛길이 어디인지, 선한 길이 어디인지 물어보고, 그 길을 걸으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쉼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는 그 길로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저도 개인적으로 교차로에 서 있는데, 몇 달째 내가 가야 하는 선한 길, 의로운 길이 어떤 길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교차로에서 왔다 갔다 하며 헤매는 나를 보며 답답한 마음뿐입니다. 갈 길은 정했는데 제 딸이 그 길을 가지 않으려 합니다. 하나님께 묻습니다. '주님, 어떤 길이 선한 길, 옳은 길일까요?'

잠언에 대한 다른 말씀 인용은 http://www.oldfaith.net/의 김효성 목사님의 '잠언 강해'를 참고했고 번역은 여러 영문번역을 비교해서 한 저의 번역본입니다. 김목사님의 잠언 강해 내용이 매우 좋습니다. 목사님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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