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책망과 완고함, 의인과 악인 그리고 백성, 지혜로운 왕, 아첨, 악인의 범죄, 거만/지혜/어리석음, 피흘림, 분노, 거짓말, 가난한 자와 압제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특히 시대의 공정한 통치자의 모습을 요구합니다.
1. He who is often rebuked and stiffens his neck will be destroyed suddenly, with no remedy.
1.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1.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멸망을 당하고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목이 곧은 백성(stiff-necked people)'이란 호칭이 나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저항과 불복종을 지적하실 때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창 32:9, 33:3, 34:9)이라 질책하셨습니다. 자주 꾸중을 들으면서도 교만하고 완고하여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잦은 책망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책망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잘못을 교정하고 올바른 길로 갈 기회로 받아들입니다. 영어성경은 '피하지 못함(개정개역)'을 'without remedy, beyond recovery(치유/회복하지 못함)'로 번역합니다. 요한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에서 전합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 3:19)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에 이르고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요한은 경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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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When the righteous thrive, the people rejoice; but when the wicked rule, the people groan.
2.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2. 의인이 번성하면 백성이 기뻐하나,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한다."
한 국가이든 교회와 같은 공동체에서든 의로운 사람이 권세를 누리며 번성하면, 지역 사회나 국가에 도움이 되고 사람들이 기뻐합니다. 그러나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지역 사회는 국가는 고통을 받습니다. 의인이 많아지면 부정과 불법 대신 정의의 질서가, 시기와 미움 대신 배려와 사랑이, 싸움과 분열 대신 협력과 화합이 자리잡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악인과 사탄은 어디에나 의로운 가면을 쓰고 스며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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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Whoever loves wisdom brings joy to his father; but a companion of prostitutes squanders his wealth.
3.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와 사귀는 자는 재물을 잃느니라
"3.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누구나 그 아버지에게 기쁨을 주지만, 창녀와 벗하는 자는 그 재산을 탕진한다."
당연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사랑하는 자녀는 그 부모에게 기쁨이요 자랑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창녀나 천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과 사귀는 사람은 자신의 인격 뿐아니라 모든 재산도 탕진하고 파멸에 이릅니다. 이 반대가 되는 사례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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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e king by justice makes the land stable, but he who takes bribes tears it down.
4. 왕은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4. 왕은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나, 뇌물을 받는 자는 나라를 망하게 한다."
한 나라는 정의로 다스릴 때 힘과 발전을 기대할 수 있고, 국가나 지역 공동체에서 뇌물이 성행하면 부정부패와 혼란으로 나라와 공동체는 멸망으로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꿈과 같은 정의만 있고 뇌물이 없는 나라가 실제로 가능할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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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A man who flatters his neighbor spreads a net for his feet.
5.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5. 이웃에게 아첨하는 사람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사람이다."
우리 말로 '아첨하다'의 사전적 뜻은 '남의 환심을 사거나 잘 보이려고 알랑거리다'로 풀이되어 있습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면 부정직하거나 속에 없는 말도 해서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해야 합니다. 이웃(친구: NLT)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덫을 놓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발 앞에 그물(덫)을 치면 걸려 넘어집니다. 상대방의 환심을 사려다가 근거 없는 칭찬을 하게 되고 상대방은 그 말을 솔깃하게 듣고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교만에 빠집니다. 결국 그는 아첨꾼이 그의 발 앞에 친 그물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또는 NLT의 번역입니다: "친구에게 아첨하는 것은 발에 덫을 놓는 것과 같다(NLT: To flatter friends is to lay a trap for their feet)"
사심으로 시작했든 사랑으로 시작했든 친지들에게 아첨하는 아첨꾼은 죄인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1)칭찬, (2)적당한 칭찬과 과도한 칭찬, 그리고 (3)아첨'의 경도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잠언 27:21은 말합니다: "도가니로 은을, 화덕으로 금을 연단하듯, 사람은 칭찬으로 연단을 받는다." 적절한 칭찬은 칭찬을 받아들이는 상대방의 그릇의 양질에 따라 연단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은이 도가니로 금이 화덕으로 연단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스스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에 의도된 아첨은 상대방을 파멸시킬 수도 있음을 우리는 인지해야 합니다.
잠언 27:6은 또 말합니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진실하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이다." 지인에게 던지는 아첨의 뿌리가 친구에게 주는 상처(아픈 책망)인지 아니면 거짓된 입맞춤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첨의 목적과 경도에 따라 아첨은 때로는 약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덫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28:23은 기록합니다: "사람을 책망하는 사람이 혀로 아첨하는 사람보다 나중에 더 존귀를 받을 것이다." 위의 27:6절에 기반한 아첨꾼의 결말을 말합니다. 결국 상대방을 위한다면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책망이 의도된 아첨보다 훨씬 낫습니다. 책망이던 아첨이던 상대방에게 주기 전에 그것을 받을 상대방의 상황과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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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An evil man is snared by his sin, but the righteous can sing and be glad.
6. 악인이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하느니라
"6. 악인은 자신의 죄로 올무에 걸리나, 의인은 노래하며 기뻐한다."
악인의 자신의 범죄로 자신의 삶과 자유를 누린다고 착각할 수 있으나, 결국 그들의 죄는 그들에게 함정과 올가미가 되어 돌아옵니다. 스스로 놓은 올무가 걸리는 셈입니다. 죄악이 악인의 것이면 노래하고 기뻐하는 것은 의인의 것입니다. 범행이 사악한 사람의 안에 있는 것의 표현인 것처럼 노래와 기쁨도 그 사람의 안에 있는 것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올무나 덫은 동물을 잡기 위해 놓는 도구입니다. 올무에 걸린다는 성경의 표현은 스스로 만든 죄악의 함정에 스스로가 빠진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죄의 종, 마귀의 종이 되어 스올의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은 30전에 팔아넘긴 가룟 유다는 양심에 가책을 받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성경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타락한 여인이었던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개들에 의한 비참한 종말로 엘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한다. 인간은 늘 범죄합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후회하며 통곡하고 회개했습니다. "주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보셨다. 그때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그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래서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눅 22:61-62)" 우리는 흔히 '후회해도 때가 늦었다'라고 말하고 합니다. 그러나 늦게라도 후회하고 돌아왔을 때 주님은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노래하며 기뻐하고 주의 복음을 전하고 다녔습니다.
사울은 회심 전에 교회를 박해하는 데 앞장 섰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 사도 바울이 된 그는 고통 중에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고통 중에도 그는 권면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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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The righteous care about justice for the poor. The wicked aren’t concerned about knowledge.
7.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7. 의인은 가난한 사람의 권리를 염려하나, 악인은 그것을 알든 모르든 상관치 않는다."
Proverbs 29:7, CSB: "The righteous person knows the rights of the poor, but the wicked one does not understand these concerns." (의인은 가난한 사람의 권리를 알지만, 악인은 그러한 우려를 이해하지 못한다.)
영어성경은 '가난한 자의 사정(개역개정)'을 '권리(rights: ESV, NASB, NLT. CSB), 대의(cause: KJV)'로 번역합니다. 의인은 가난한 사람의 사정, 어려움, 고통, 억울함, 사건 등을 이해하고 알아줍니다.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이웃 사랑과 구제를 실천합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들의 그런 걱정에 관심도 없도 외면하고 못 본 체합니다. 그들을 염려하고 돕는 의인을 하나님은 더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눈을 돌리고 못 본 체하는 악인은 심판과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잠언 28:27은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겠지만, 그를 못 본 체하는 사람은 많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말합니다. 잠언 11:25에서는 "관대한 사람은 풍족해질 것이고,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해질 것이다" 기록합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는 연민 이상의 반응입니다. 그들의 사정을 아는 것 이상으로 배려는 행동이 따르는 구제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를 부인하는 사람은 그들의 걱정에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보고도 못 본 체 합니다. 그들에 대한 배려와 도움이 자신의 사리사욕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학자 Waltke는 말합니다: “그의 무지와 이해 부족은 지적 결함이 아니라 사악한 왜곡의 표현이다 (His ignorance and lack of understanding is not an intellectual defect but the expression of an evil perversion)” 악인의 '남 몰라라 식의 행동'은 무식(무지)이 그 이유가 아니라 그들 안의 사악함이 표출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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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Mockers stir up a city, but wise men turn away anger.
8. 거만한 자는 성읍을 요란하게 하여도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하느니라
"8. 거만한 사람은 성읍을 소란스럽게 하나, 지혜로운 사람은 분노를 가라앉힌다."
거만한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의 대비입니다. 영어번역은 '거만한 사람(mockers: NIV/NLT/CSB),' '조롱하는 사람 (scoffers: ESV/KJV)', 교만한 사람(arrogant people: NASB)으로 번역합니다. 거만한 사람은 성읍을 소란하게 한다(WEB, NIV), 도시에 불을 지른다(ESV), 도시를 함정에 빠뜨린다(KJV), 도시를 동요시킨다(NLT).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the wise)은 분노를 가라앉힌다.
앞에서 솔로몬은 의인과 악인, 그리고 마을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의인이 잘되면 마을이 기뻐하고, 악인이 멸망하면 마을이 즐거워 소리친다.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마을이 흥하게 되지만, 악한 자의 입으로 마을이 무너진다 (잠 11:10-11)"
이 구절에서는 거만한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을 마을과 연관하여 말합니다. 거만한 사람은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조롱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요구하기 위해 소리를 높이기 때문에 마을을 소란하게 합니다. 그들은 마을에 평화, 질서, 화합 대신 혼란, 무질서, 분열, 다툼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겸손하고 오래 참고 인내하기 때문에 분노를 가라앉힙니다. 그들이 있는 마을은 평화, 질서, 화합, 단결이 있습니다. 잠언 15:18은 "분을 쉽게 내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키나, 화내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싸움을 그치게 한다" 말합니다. 거만한 사람은 분을 쉽게 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화내기를 더디하기 때문에, 거만한 사람이 마을에 많으면 시끄럽고 지혜로운 사람이 많으면 평화가 깃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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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If a wise man goes to court with a foolish man, the fool rages or scoffs, and there is no peace.
9.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
"9. 지혜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과 같이 법정으로 가면, 어리석은 사람이 노하거나 비웃게 되어 평화가 없다."
NIV: "If a wise person goes to court with a fool, the fool rages and scoffs, and there is no peace."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과 법정으로 가면, 어리석은 사람이 노하고 비웃고, 평화가 없다.)
ESV: "If a wise man has an argument with a fool, the fool only rages and laughs, and there is no quiet." (지혜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과 논쟁을 하면, 어리석은 사람은 노하고 웃기만 하고 조용할 수 없다.)
NLT: "If a wise person takes a fool to court, there will be ranting and ridicule but no satisfaction." (지혜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법정에 세우면, 고함과 조롱만 있지 만족을 없을 것이다.)
CSB: "If a wise person goes to court with a fool, there will be ranting and raving but no resolution." (지혜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과 법정에 가면, 고함과 시끄러움만 있지 결론은 없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같이 법정에 갈 경우를 말하는데, 구절의 '노하든지 웃든지'의 주어가 지혜로운 자(개역개편)라면, '그가 노하여 어리석은 자를 꾸짖던지 아니면 웃으며 말하든지'일 것이고, 주어가 어리석은 자(NIV/ESV/WEB)라면 '그가 노하든지 상대방을 비웃든지' 평화(다툼의 그침, 만족, 결론, 조용함)가 없다. NLT와 CSB는 특정된 주어가 없어 보입니다. 그들이 같이 법정에 가면 고함과 시끄러움, 조롱, 비웃음, 노함만 있고 평화, 조용함, 만족, 결론이 없다.
노하거나 웃는 주어가 누군지 상관 없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법정에 갈 경우, 그들의 삶의 기반과 원칙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 간에 다툼, 논쟁, 분노, 비웃음, 조롱, 결론, 시끄러움이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둘 사이의 평화, 조용함, 만족, 확신과 결론이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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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The bloodthirsty hate a man of integrity; and they seek the life of the upright.
10.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
"10. 피에 굶주린 사람은 흠 없는 사람을 미워하여, 정직한 사람의 생명을 노린다."
피에 굶주린 사람과 흠 없는 사람들 사이에 근본적인 반대가 있는데, 폭력과 피 흘림의 잔인함에 사로잡힌 그들은 정직한 사람을 근본적으로 미워합니다. 정직한 자의 삶과 메시자가 피에 굶주린 자를 유죄로 판결하고 피에 굶주린 자는 정직한 자들을 모두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에서 피에 굶주렸던 일례를 떠올리면서 존 트랩이 한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래 인용)
"파리 대학살의 저자 샤를 9세는 오랫동안 묻히지 않고 있다가 악취가 나는 제독의 시체상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Quamsuiter rolet caradoini!(적의 시체 냄새가 이렇게 달콤할 수가!) 그리고 자신이 전투에서 죽인 개신교 신하들의 시신을 지켜본 스코틀랜드의 여왕 어머니는 평생 이보다 더 훌륭한 태피스트리 조각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추가적인 역사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자료참조: 네이버 지식in):
파리 대학살(바르톨로메오 대학살: 1572년) 당시 유럽은 신교와 구교로 갈라져 나라들이 종교다툼이 있던 시기였다. 프랑스도 가톨릭을 믿는 프랑스 본토와 개신교를 믿는 나바르라는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벌인 전쟁이 '위그노 전쟁(36년간 지속)'이었다. 그 대학살의 주역은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샤를 9세와 학살의 주도자였던 그의 어머니 카트린 드 매디치(철저한 가톨릭 신자였던 악녀)였다. 그녀는 신교와 구교의 화해를 위해 앙리에게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제의하는데 앙리는 수많은 개신교들을 이끌고 파리로 갔는데 카트린은 생각을 바꾸어 개신교도 학살을 단행한다. 유혈의 결혼식이 되었고 샤를 9세가 죽은 후 앙리가 앙리4세로 즉위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낭트칙령을 발표하고 그 스스로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역사적 배경을 보니 학생 때 공부한 기억이 나는데 인간이 이처럼 잔인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의 영어번역에서, 뒷부분의 주어와 목적어 번역들이 상이합니다. 제가 사용하는 WEB는 '피에 굶주린 자는 정직한 자의 생명을 노린다'; NASB/CBS는 '정직한 사람은 자신을 돌본다'(NASB는 뒤의 '그'가 피에 굶주린 자인지 정직한 자인지 불분명); NLT는 '정직한 사람은 피에 굶주린 자를 도우려 한다'
NASB: "People of bloodshed hate the blameless person, But the upright are concerned for his life."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흠 없는 사람을 미워하지만, 정직한 사람은 그의 생명을 걱정한다.)
CSB: "Bloodthirsty men hate an honest person, but the upright care about him." (피에 굶주린 사람은 정직한 사람을 미워하나, 정직한 사람은 자신을 돌본다.)
NLT: "The bloodthirsty hate blameless people, but the upright seek to help them." (피에 굶주린 사람은 흠 없는 사람을 미워하나, 정직한 사람은 그들을 도우려 한다.)
상이한 영어성경의 번역을 고려하지 않아도, 피에 굶주린 자와 정직한 자의 가장 큰 차이는 인류의 평화를 추구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가의 문제입니다. 정직한 자는 자신이던 상대방이든 인간의 생명을 구하고 염려합니다. 생명은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하나님은 선하고 계명에 따라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스스로 선한 생명을 살뿐 아니라 타인의 생명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그의 생명(his life)'이 정직한 자의 생명이든 피에 굶주린 자의 생명이든 둘 다 인간의 생명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비단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생명은 소중하고 지켜야 합니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 바르톨레메오 대학살의 이야기를 읽으니 사상의 차이를 떠나서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 한번 생각나게 합니다. '적의 시체 냄새, 훌륭한 태피스티리 조각'에 대한 언급은 소름이 끼칩니다. 종교가 인간의 역사에 얼마는 큰 비극을 주었는지 그 현장의 피 비린내 나는 이유기를 통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슬프게도 그 비극은 지금도 끝나지 않는 진행 중인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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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A fool vents all of his anger, but a wise man brings himself under control.
11.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11. 어리석은 자는 자기 분노를 다 드러내지만, 지혜로운 자는 화를 절제한다."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이 분노에 대한 각자의 태도를 말합니다. 영어성경은 '노(개역개정)'라는 단어를 'rage(분노), spirit(영혼), mind(마음), temper(기분), anger(화)'로 번역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어리석은 자의 자존심, 자제력과 타인에 대한 예의에 대한 어리석은 공격성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때와 장소'가 있음을 알고 자신의 감정과 분노를 조절하고 억제합니다.
잠언 12:16도 "16. 어리석은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지만, 신중한 사람은 모욕을 참는다"라고 말하였고, 잠언 16:32에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정복하는 사람보다 낫다"라고 기록합니다. 누구나 어리석은 자가 되기를 원치 않고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지혜의 기본중 하나는 감정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 기분, 생각, 의도, 마음, 의견, 특히 오늘의 본문에서는 분노와 화에 대한 조절과 억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솔로몬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자신의 감정과 분노를 무조건 통제하라는 말이 아니라 적절하게 그것을 드러낼 '때와 장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9는 '말씀과 들음의 행함'이란 제목으로 기록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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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If a ruler listens to lies, all of his officials are wicked.
12. 관원이 거짓말을 들으면 그의 하인들은 다 악하게 되느니라
"12. 통치자가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면, 그의 신하들이 모두 악해진다."
통치자에게는 그를 섬기는 부하들이 있습니다. 그 부하들은 상사의 힘과 지위를 이용하여 자기 발전의 기회를 삼으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부하들은 상사에게 영향력을 주거나, 겁을 주거나 조정하거나 단순히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통치자는 그런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옛날의 왕이나 현대의 대통령이나 최고 권력자들을 높고 엄격한 기준을 세우고 유지하여 그 행정부에 만연할 수 있는 부패의 결과에 직면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통치자들이 거짓말에 현혹되고 영향을 받는 것을 보면, 그 부하들은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속임수가 보상을 받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통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지혜로운 통치자라면 부하의 속임수, 아첨, 거짓말과 진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정치에서도 부하를 잘못 두어(부하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여) 나라 전체가 혼돈으로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지도자라면 지혜로운 부하를 분별하고 스스로 판단하기 전에 그의 지혜에서 어떻게 나라를 경영할 것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진실이 승리하고 도덕성을 중시하는 나라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잠언 6:16-19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가 있다. 교만한 눈, 거짓된 혀, 죄없는 사람을 피 흘리는 손, 악한 계획을 꾀하는 마음, 범죄하러 급히 달려가는 발, 거짓말을 하는 거짓 증인, 형제들 사이에 불화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다." 말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와 같은 공동체나 사회에 이런 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돌아다닌다면 정의와 화합과 단결 대신 불법과 이간질과 거짓말과 다툼이 끊임이 없을 것입니다. 부패는 신하가 만들 수 있지만 부패 척결은 지혜로운 통치자에 의해 가능합니다. 따라서 의로운 통치자와 지도자를 뽑은 것이 백성으로 시민으로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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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The poor man and the oppressor have this in common: Yahweh gives sight to the eyes of both.
13.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
"13. 가난한 사람과 압제자가 다 함께 살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들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신다."
영어성경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대상은 '가난한 자와 압제자(기만하는 자)'이고 하나님은 그들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신다(그들 모두의 눈에 시력을 주신다). 후자의 경우 듣는 시각에 따라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나 압제자(기만자) 모두에게 '빛을 주신다'는 말은 축복을 주신다는 말로 들리고, '시력을 주신다'는 말은 '볼 수 있는 자는 스스로 보고 판단하라'는 말로 들립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앞은 객관적으로 뒤는 주관적입니다.
솔로몬은 가장 극명한 대조를 합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아닌 가난한 사람과 압제자. 누가 보아도 하나는 '갑'이고 하나는 '을'입니다. 그러한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신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모든 사람에게 빛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그 빛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거나 거부할 수 있지만,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모두의 눈에 빛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조물주와 인간 사이의 아이러니인데 팩트입니다.
한 학자의 설명이 흥미롭습니다. "모든 지성은 그것이 의로움에 사용되든 사악함에 사용되는 하나님이 주신 신의 선물이다. (Morgan)" 맞습니다, 우선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몫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의로움에 사용하는 사람은 의인이고 지혜로운 자이나, 그 선물을 사악함에 사용하는 사람은 악인이고 어리석은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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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The king who fairly judges the poor, his throne shall be established forever.
14.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14. 왕이 가난한 사람을 공평하게 재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할 것이다."
한 나라의 왕이나 지도자의 책임 중 하나는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가난하고 불리한 자에 관한 판단에 대한 책임을 말합니다. 지도자는 판단을 함에 있어서 편파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그의 지위는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앞의 구절에서 하나님이 가난한 자와 압제자 모두의 눈에 빛을 주셨듯이, 가난한 자와 부자 모두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잠언 20:28은 인자와 신실함으로 왕은 나라를 안전하게 지켜야 그의 왕좌도 인자함으로 견고하다 했습니다: "사랑과 신실함은 왕을 안전하게 지키고, 그의 왕좌도 사랑으로 견고하다." 또한 잠언 29:4도 말합니다: "왕은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나, 뇌물을 받는 자는 나라를 망하게 한다". 우리도 성경의 역사에서 왕의 선하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악하면 심판을 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잠언에 대한 다른 말씀 인용은 http://www.oldfaith.net/의 김효성 목사님의 '잠언 강해'를 참고했고 번역은 여러 영문번역을 비교해서 한 저의 번역본입니다. 김목사님의 잠언 강해 내용이 매우 좋습니다. 목사님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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