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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성경묵상

야고보서(James)1:19-27(듣기는 빨리, 말하기는 더디게)

by 미류맘 2021.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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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라 가르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특히 혀를 잘 단속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19.  So, then, my beloved brothers, let every man be swift to hear, slow to speak, and slow to anger;
20.  for the anger of man doesn’t produce the righteousness of God. 

말씀을 들음과 행함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19.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20. 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아 래(인용 및 편집: sermonwriter 그리고 개인 멘트 포함) -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19a, 개역개정).  야고보는 신도들을 형제 여러분이라고 부르며 중요한 할 말이 있음을 알립니다.  구절 하나에 더할 것도 삭제할 것도 없는 멋진 조언입니다. 우리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중에 누구의 가치를 높게 생각할까요? 듣는 사람이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심리학자 故 조이스 브라더스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방이 아니라 듣는 것이 가장 진실된 아첨의 형태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싶다면,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그가 말을 마치면, 독자 분이 이해하지 못하는 요점에 대해 물어보세요. 그런 다음 그에게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당신이 동의하는 영역과 동의하지 않는 영역을 지적하세요. 그는 여러분이 열심히 들어주고,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그의 입장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어 한다는 것에 기뻐할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같은 이 듣기에 대한 조언이 사실일 수 있을까? 우리는 기도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합법적이다. 하지만 기도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조용히 듣고 있을 수 있다. 경청하는 한 가지 방법은 성경의 한 구절을 읽고, 그 구절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 그리고 나서 답을 듣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Each One Teach One" 읽고 쓰는 능력 프로그램을 개발한 기독교 선교사 故 프랭크 라우바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도하는 거의 모든 이들의 문제는 그가 '아멘'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답할 기회를 갖기 전에 달아난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생각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성내기도 더디 하라” (19c, 개역개정).  훌륭한 조언이다. 성미가 급한 사람들은 또한 말을 빨리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관계를 손상시키며,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해치는 방식으로 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 유머 작가인 윌 로저스는 "분노하는 사람들은 항상 착륙이 좋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들은 그렇다.

하지만 야고보는 화를 완전히 금지하지는 않는다. 분노는 때로 적절하다. 우리는 그것을 의분(義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말하기는 더디 하며 "(19b, 개역개정)는 여전히 적용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섣불리 화를 내는 것보다 신중한 말과 행동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0절, 개역개정) 빨리 분노를 내면 죄가 되는 말과 행동을 낳기 쉽다 – 이는 하나님의 의로움과는 정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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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Therefore, putting away all filthiness and overflowing of wickedness, receive with humility the implanted word, which is able to save your souls.
22.  But be doers of the word, and not only hearers, deluding your own selves.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1. 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심어진 말씀을 겸손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22.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고, 듣기만 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이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 아 래(인용 및 편집: sermonwriter 그리고 개인 멘트 포함) -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21, 개역개정). "그러므로"는 이 구절을 19-20절과 연결하는데, 이것은 야고보가 지나치게 빠른 말과 분노를 더럽고 악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도 바울은 더러움과 사악함을 버려야 할 강력한 근거를 제공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세례를 받아 예수와 하나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냐? 이는 그리스도와 같이 더러움과 사악함이 설 자리가 없는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이다' (롬 6:1-4).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1b, 개역개정).  "내버리는 것(putting away)"은 첫 번째 단계일 뿐이다. 일단 더러움과 사악함을 제거하고 나면, 우리는 그 빈자리를 심어진 말씀으로 겸손히 채워야 한다.

이것은 또한 마태복음 12:43-45을 연상시키는데, 예수는 자기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부정한 영혼에 대해 말한다. '그 부정한 영혼은 돌아와서 보니 그 집이 비어 있고 깨끗이 치워진 것을 보고, 자기보다 더 악한 일곱 영혼들을 데리고 와서 그 영혼들이 그 안에 들어가서 살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마지막 상태는 첫 번째 상태보다 더 나빠졌다.' 그것은 우리가 정돈된 집을 감히 비워둘 수 없다는 경고로 작용하지만, 원래의 악이 다시 우리를 괴롭히지 않도록 그 집을 경건한 존재로 채워야 한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22a, 개역개정).  우리는 그 말을 듣는 것에서 벗어나 그것을 행하여야 한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롬 2:1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2b, 개역개정).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견고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마지막 심판에서 그들은 시험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20)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1:22)

또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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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For if anyone is a hearer of the word and not a doer, he is like a man looking at his natural face in a mirror;
24.  for he sees himself, and goes away, and immediately forgets what kind of man he was.
25.  But he who looks into the perfect law of freedom, and continues, not being a hearer who forgets, but a doer of the work, this man will be blessed in what he does.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로 자기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자기를 보고 가서 금방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잊어버립니다. 25. 그러나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살피는 사람은 듣고 잊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 아 래(인용 및 편집: sermonwriter 그리고 개인 멘트 포함) -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3-24, 개역개정). 학자들은 '자기의 생긴 얼굴(natural face, 그리스어: to prosopon tes geneseos autou - 타고난 얼굴, 창조의 얼굴)'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잉크를 썼다고 합니다.

한 성경해석가의 말입니다: "나는 사람의 타고난 얼굴이 아니라 예수의 추종자로 다시 태어난(거듭난) 얼굴(출생 또는 창조물)을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사람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지만, 일상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 세속적인 걱정에 사로잡히고 자신의 경건한 정체성을 잊는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새로운 정신적 정체성에 따라 살지 못하는데, 말씀을 듣는 것 이상으로는 살아가지 못한다."

듣기만 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신앙인의 삶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보고 바로 잊는 사람과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신의 얼굴을 거울을 통해 보고 자신의 정체성(하나님 자녀로서의)을 확인합니다. 자신의 생활전선으로 들어가서는 세상의 걱정에 사로잡혀 자신의 정체성을 잊게 됩니다. 그 모습이 다람쥐가 체바퀴에 돌아가듯 반복되는 생활, 말씀을 듣기만 하고(이해하고) 행동하지 않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나, 여러분,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25a, 개역개정). 이 구절은 동전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 – 그 말씀을 듣고 기억하고 그것으로 삶을 사는 사람.

야고보가 유대인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들이 "온전한 율법"을 보았을 때, 그들은 자연스럽게 모세의 율법을 떠올렸다. 하지만,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문구는 아래를 참조하기 바란다.

모세의 율법(613개 명령)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아주 상세하게 규정했다. 탈무드(수 천 개가 넘는 규율)는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일 제한과 같은 계명의 정확한 한계를 명시하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성서학자들도 모든 규칙을 기억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일반인은 글을 읽을 줄 알더라도 성경책에 접근할 수 없었고 율법을 어겼을 때 막연한 생각만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예수님는 율법보다 은혜의 지배를 받게 하셔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셨다. 또한 계명도 주셨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마 22:37-40).

모세의 율법은 우리의 삶을 조이는 법이고 예수님의 율법은 은혜에 기반한 법이기 때문에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킬 수 없는 모세의 율법이 아닌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십계명도 주셨습니다.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25b, 개역개정). 22a절에서, 야고보는 "말씀을 행하는 자(doers of the WORD)"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여기서 그는 "실천하는 자(a doer of the WORK)"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사람은 좋은 일, 즉 선행을 하고,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행동한다.

듣는 사람과 행동하는 사람의 차이는 립 서비스(lip service)와 서비스(service) 간의 차이이다. 그것은 공허한 제자정신과 완전한 헌신 사이의 차이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차이일 수도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필요가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도록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탄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지만, 예수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런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5c, 개역개정).  하나님은 말씀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셔서 그는 좋은 일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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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If anyone among you thinks himself to be religious while he doesn’t bridle his tongue, but deceives his heart, this man’s religion is worthless.
27.  Pure religion and undefiled before our God and Father is this: to visit the fatherless and widows in their affliction, and to keep oneself unstained by the world.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순결하고 더럽지 않은 경건은 이와 같으니, 고통 속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자기를 지켜서 세상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구절에서, 야고보는 일반적인 원리, 즉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과 좋은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세 가지 예를 든다.

"혀에 재갈을 물리고" (26절, 개역개정)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27절, 개역개정)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27절, 개역개정)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6절). 야고보는 이미 독자들에게 "말하기는 더디 하며" 조언했다 (19절).

3장에서 야고보는 말씀의 중요성에 대해 매우 자세히 다룰 것이다. 
그는 혀를 말의 온 몸을 끌고 다니는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에 비유할 것이다 (3:3) – 그리고 거대한 배의 진로를 조정하는 방향키 (3:4) – 그리고 근 숲을 위협할 수 있는 조그만 불씨 (3:5)에 비유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 혀는 곧 불이요...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3:6) 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모든 종류의 동물이 길들여질 수 있지만 혀는 길들여질 수 없다고 지적한다.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3:8b절)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 그의 신앙은 헛된 것이다. 야고보는 여기서 위선자라는 단어를 쓰지 않지만 그 단어가 떠오른다. 위선자는 진짜 모습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해당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무대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영적 영역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예수님은 위선자들이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마 23:3)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지만, 그들을 돕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기 위해서" 그들의 일을 한다. 그들은 대중의 찬사를 좋아한다. 그들은 랍비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집을 집어삼키고, 구실로 긴 기도를 한다" (마 23:1-13)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27a절, 개역개정). 예수님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동정심을 갖기를 기대한다. 미망인과 고아들이 좋은 예이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도 취약하다.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27b절, 개역개정).  aspilos라는 단어는 a(없는) 와 spilos(오점, 흠)를 결합한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우리의 도덕적인 행동을 요구하신다. 그는 흠 없이 자신의 도덕적인 발자취를 따라 걷도록 우리를 부른다.

"세상에"(그리스어: kosmos) 우리는 코스모스 세상, 즉 하느님과 반대되는 세상, 종종 악마에 속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우리를 되돌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겠다고 위협하는 생각과 행동을 하도록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고 구하기 위해 그의 독생자를 보냈지만 (요 3:16),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불명예스럽게 하고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증인을 위태롭게 할 그런 것들에 대한 세상의 유혹에 저항할 필요가 있다.

오늘 말씀묵상도 해외 성경해설 사이트의 성경학자의 글에서 내용을 번역, 편집해서 정리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화자와 청자의 입장에서 나는 어떤 입장으로 말을 하고 듣는지 생각해 봅니다. 대화 중 듣기 전에 상대방의 말을 자르지는 않았는지? 나의 의견을 전하기 위해 말하기를 빨리, 길게 하지는 않았는지? 나는 '말씀을 듣는 자, 말씀을 행하는 자, 말씀을 실천하는 자' 중에 어디에 해당하는지? 노하기를 더디하였는지?

그리고 기도를 하면서 내 말만 일방적으로 하고 '아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하였는지? 나의 혀에는 재갈이 물려있는지?

BIBLIOGRAPHY: 
https://sermonwriter.com/biblical-commentary-old/james-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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