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은혜의 보좌로 초대한다. 그리고 옛날 영원한 대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을 언급하면서 그보다 위대한 '온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증명한다.
14. Having then a great high priest, who has passed through the heavens, Jesus, the Son of God, let us hold tightly to our confession.
15. For we don’t have a high priest who can’t be touched with the feeling of our infirmities, but one who has been in all points tempted like we are, yet without sin.
16. Let us therefore draw near with boldness to the throne of grace, that we may receive mercy, and may find grace for help in time of need.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4-16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님
14. 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시니, 우리의 고백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15. 우리의 사제는 우리의 연약함에 동정하지 못하는 분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서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가 없으셨습니다. 16.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은혜의 보좌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그러면 자비와 은혜를 받아서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시니" (14a절). 이스라엘에서는 죄에 대한 속죄가 가장 중요했고,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목적으로 세우신 희생제사를 대제사장이 관장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하나님의 거처인 거룩한 성소에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에 대한 최고 권력인 산헤드린 교회를 감독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즉 하나님과의 중개인이자 구원의 궁극적 중재자의 역할을 맡았다. 저자는 예수가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므로 그는 일년에 하루 속죄일에만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었던 지상의 대제사장들보다 뛰어나시다.
"우리의 고백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14b절). 바울은 고린도후서 9장 13절에서 이 말을 사용하는데, 여기서 그는 고백(homologia)'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정의한다.
"우리의 사제는 우리의 연약함에 동정하지 못하는 분이 아닙니다" (15a절). 15절은 전치사 'for'로 연결됩니다. 14절에서 우리가 우리의 고백(믿음)을 굳게 잡아야 하는 이유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소위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을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배고픔, 갈증, 고통 뿐아니라 십자가가 있는 세상을 경험하셨습니다.
"모든 일에서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가 없으셨습니다" (15b절).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때 받으신 시험을 기록합니다(마 4:1-11; 막 1:12-13; 누 4:1-13). 그러나 학자는 그것이 예수님이 받으신 유일한 유혹이 아니었음을 밝힙니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마친 후에 얼마 동안 (예수로부터) 떠났다" (눅 4;13). 학자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동정하실 뿐만 아니라 도울 수 있고 또 도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세상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요 3:17).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은혜의 보좌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16a절). 저자는 우리에게 자신감과 대담함으로 은혜의 보좌로 다가가라고 격려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인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인" (롬 8:14-17)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심을 알고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 자신과 용기를 내어 주님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죽고 부활한 뒤에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가까지 갈 것이라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갈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다가가고 있다.
"그러면 자비와 은혜를 받아서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16b절). 어떤 학자는 '은혜(grace)'와 '자비(mercy)'를 구분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고, 우리가 가엽을 때 자비를 베푼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것이 은혜이든 자비이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값없이 온 것입니다. 그 자체가 놀라운 은혜이고 자비가 아닐까요?
1. For every high priest, being taken from among men, is appointed for men in things pertaining to God, that he may offer both gifts and sacrifices for sins.
2. The high priest can deal gently with those who are ignorant and going astray, because he himself is also surrounded with weakness.
3. Because of this, he must offer sacrifices for sins for the people, as well as for himself.
4. Nobody takes this honor on himself, but he is called by God, just like Aaron was.
5. So also Christ didn’t glorify himself to be made a high priest, but it was he who said to him,
“You are my Son. Today I have become your father.”
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3.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히브리서 5:1-5 너는 내 아들이다
1. 대제사장은 누구나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서 하나님께 속한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속죄를 위한 예물과 희생 제물을 바칩니다. 2. 그 또한 나약함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무지하거나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할 수 있습니다. 3. 이런 이유로 백성을 위하여 하듯이 그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4. 이 영광은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고, 아론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5.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스스로 영광을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었다."
"대제사장은 누구나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서 하나님께 속한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1절).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속한 일'에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이 임명하신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속죄가 중요했기 때문에 대제사장은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동물 희생 제사와 예물을 바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 또한 나약함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2절). 대제사장은 하나님이 임명하신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흠없는 사람이었지만 그 또한 인간의 나약함과 세상의 유혹에 둘러싸인 삶을 살았습니다. 따라서 그 또한 죄의 대상이 되었고, 무지하고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할 수 있었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이런 이유로 백성을 위하여 하듯이 그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3절). 레위기는 대제사장 아론이 백성을 위한 속제의식을 거행할 때 자신과 그의 집안을 위해서도 속죄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아론은 자신을 위해 속죄제물로 수송아지를 드려라. 그래서 자신과 집안을 위한 속죄를 하고, 자신을 위한 속죄제물인 수송아지를 잡아야 한다... 그가 성소에서 속죄하기 위해 들어가서 자신과 그의 집안과 모든 이스라엘 회중을 위해 속죄하고 나올 때까지 아무도 회막 안에 있으면 안된다... 그런 다음에 성소에서 물로 목욕을 하고 자기 옷을 입고 나와서 자신의 번제물과 백성의 번제물을 바쳐라. 그리고 자신과 백성을 위해 속죄 예식을 행하라... 그리고 그는 제사장들과 온 백성의 회중을 위해 속죄를 해야 한다" (레 16:11, 17, 24, 33).
"이 영광은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고, 아론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4절). 대제사장도 흠있는 사람이었지만 저자는 그들은 스스로 또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영광을 인정합니다.
아론은 모세의 동생으로, 모세가 자신이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하다"라고 주장했을 때(출 4:10-16) 여호와가 모세의 대변자로 임명하였다. 금송아지 만들기(출 32장)를 선동한 장본인이지만 용서를 받고 모세의 이인자로 사제직을 계속했다.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으러 산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을 불러 제사장으로 섬기도록 하라고 명령하셨다(출 28:1).
나중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이스라엘의 속죄를 포함하여 지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임무를 맡았다(대상 6:49). 다른 제사장들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을 돕는 임무를 맡았다(대상 23:28).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스스로 영광을 취한 것이 아니라" (5절). 저자는 예수님과 새 언약이 모세와 옛 언약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유대교 기독교인들에게 보여주는 데 관심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구절에서 그는 (예수의 이름 대신 그리스도와 메시아라는 호칭을 사용)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그리스도는 자신이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스스로 영광을 취하지 않았다. 아론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듯이,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다.
- 하나님이 그리스도께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 오늘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었다."(시 2:7). 이는 하나님이 아론이나 아론의 자손에게 한 번도 하지 않으신 말씀이다.
성경의 존경받는 많은 인물들이 거의 모두 인간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우리는 들어 알고 있습니다. 아론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백성에게 그것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격려했기 때문에 그도 인간의 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죄를 지은 사람들을 동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자가 주장하듯이 히브리서는 유대교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새 언약'과 '모세의 옛 언약'을 비교할 때 예수님의 새 언약이 우월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모세보다 우월함을 강조합니다.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너는 나의 아들이다. 오늘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었다'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6. As he says also in another place, “You are a priest forever, after the order of Melchizedek.”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히브리서 5:6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
6. 또 다른 곳에서 말씀하였습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다."
이 구절은 시편 110장 4절에서 인용되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멜기세덱에 대해 처음 듣는다. 그돌라오멜이 이끄는 네 명의 왕들이 다섯 명의 반항적인 왕들(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을 포함한)과 전투를 벌였다. 그돌라오멜과 그의 동맹들은 소돔을 격파하고, 아브람의 조카 롯을 포로로 잡았다. 아브람은 훈련받은 318명을 데리고 가서 롯을 풀어 주었다. 그래서 롯과 그의 동료 포로들, 그리고 그들의 재물을 되찾았다. 소돔 왕이 아브람을 만나러 나갔다 (창 14:14-17). 그리고:
“Melchizedek king of Salem brought out bread and wine:
and he was priest of God Most High.
He blessed (Abram),
and said, ‘Blessed be Abram of God Most High,
possessor of heaven and earth:
and blessed be God Most High,
who has delivered your enemies into your hand.’
Abram gave him a tenth of all” (Genesis 14:18-20).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져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넘기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말했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창 14:18-20).
멜기세덱이 왕이었던 살렘은 시편 76장 2절에서 예루살렘으로 확인된다. 후에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이 "정의의 왕"을 의미하고, 살렘의 왕으로서 "평화의 왕" (7:2)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멜기세덱이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태어난 날과 죽은 날이 언제인지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아들같이 영원한 제사장으로 있는 자"(7:3)라고 말한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준 십분의 일, 그리고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한 것을 보면 멜기세덱이 아브람보다 우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히브리서 저자는 이를 두고 "높은 사람이 낮은 자를 축복한다"(7:4,7)라고 해석한다.
저자는 예수가 제사장급 지파인 레위인보다 유다 지파에 속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시편 110장 4절을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기 때문에" (7:18) 레위 지파에서 제사장을 임명하라는 계명이 무효화됐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는 말한다:
“Jesus has become the collateral of a better covenant.
Many, indeed, have been made priests,
because they are hindered from continuing by death.
But (Jesus), because he lives forever,
has his priesthood unchangeable.
Therefore he is also able to save to the uttermost
those who draw near to God through him,
seeing that he lives forever
to make intercession for them” (7:22-25).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담보물이 되셨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제사장이 된 것은
죽음으로 제사장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그의 성직자직은 변함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통해 하나님게 가까이 가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다.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재하시기 때문이다" (7:22-25).
번역하면서 '멜기세덱'이란 사람을 읽은 기억이 나서 성경검색을 하니 13건이 결과로 나옵니다. 창세기에서 2회, 시편에서 1회, 그리고 나머지는 히브리서입니다. 저자가 지속해서 '영원한 제사장'으로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한 가지 이유는 멜기세덱이 아브람(아브라함)보다 우월했음을 주장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저자는 멕기세덱이 뛰어남을 성경을 통해 설명하고, 그와 비교될 수 없는 - 그보다 더 뛰어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증명합니다. 저자의 설명처럼 우리의 모든 초점은 예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고 계시면서 죄가 없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붙들 유일한 존재 -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중재자이십니다.
성경을 번역하면서 오해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역하는 것임을 느낍니다. 번역된 한글성경의 경우 의역이 많아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경우도 발견됩니다. 우선 영어성경을 파파고로 돌려서 직역하고,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부분을 여러 버전과 비교해서 재번역 및 편집을 하면 오해의 소지가 (조금이라도) 없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7. He, in the days of his flesh, having offered up prayers and petitions with strong crying and tears to him who was able to save him from death, and having been heard for his godly fear,
8. though he was a Son, yet learned obedience by the things which he suffered.
9. Having been made perfect, he became to all of those who obey him the author of eternal salvation,
10. named by God a high priest after the order of Melchizedek.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히브리서 5:7-10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대제사장
7. 그는 육체로 계실 때,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는 이에게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탄원을 드렸고, 그의 경건한 두려움으로 인해 들음을 받았습니다. 8.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자신이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습니다. 9. 온전하게 되셔서 자신에게 손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10. 하나님으로부터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대제사장으로 임명받으셨습니다.
7절, 저자는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혈육(血肉, 살과 피)'을 가지신 존재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경건한 두려움(godly fear)'라고 번역된 것은 공포(fear)라기 보다는 '경건(reverence)'나 'devotion(헌신, 믿음)'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낫다는 학자의 설명이 있습니다.
올리브산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셨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가 원하시면 이 잔을 내게서 치워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한 천사가 와서 그에게 힘을 주었다. 그리고 예수는 "고통 속에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의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 (눅 22:42-43; 마 26:38-39; 막 14:34-36 참조)
십자가형을 앞두고 올리브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에서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이 아닌 용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예수님이 결정하신 용기와 대담함, 그리고 한결같은 복종은 우리로서는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자신이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습니다" (8절). 우리는 예수님이 "순종함을 배웠다"는 것을 보고 놀란다. 그는 항상 순종적이지 않았나요?
그러나 누가는 우리에게 어린 시절 예수가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수의 부모와 헤어져 성전 안에 있는 선생님들을 그의 지혜와 대답으로 놀라게 한 것을 보여 준다. 마리아와 요셉은 그가 실종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걱정하며 성읍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들이 예수를 찾았을 때, 마리아가 물었다. "아들아, 어찌하여 우리를 이렇게 대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다" 예수께서 건방지게 대답하셨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했습니까?" 이는 세상에 계신 제 아버지에게 통하지 않을 대답이다. 그러나 누가는 말한다:
“And (Jesus) went down with them, and came to Nazareth.
He was subject to them,
and his mother kept all these sayings in her heart.
And Jesus increased in wisdom and stature,
and in favor with God and men” (Luke 2:42-52).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가서 나사렛에 이르러
그들에게 순종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가슴에 두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눅 2:42-52).
그래서 예수는 처음부터 네 가지 방법으로, 즉 이해와 키, 그리고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성장해야 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성장은 순종적인 성장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자신에게서 고난의 잔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셨지만,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시지고, 또 그렇게 하실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고 싶었지만,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일을 하셨고 성장하셨다.
"온전하게 되셔서 자신에게 손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9절).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그리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 (빌 2:7-8).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가능성을 이끌어내셨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대제사장으로 임명받으셨습니다(10절).
오늘의 묵상도 엄청 긴 내용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sermonwriter의 해설을 번역.편집하여 올립니다. 저자는 크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멜기세덱보다 위대하심을 성경을 통해 증명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어린시절, 순종, 그리고 십자가에서 인간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부르짖는 것 모두를 성경을 통해 설명하는 해설가의 설명도 내용이 너무 좋습니다.
예수님은 해설가의 설명대로 네 가지 방법 - 이해와 키, 영적으로 사회적으로의 성장하셨고, 그러한 신실한 성장의 겸손의 밑걸음이 되지 않았을까요? 이해과 키가 자라고,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성장하면서, 우리는 겸손이라는 높은 곳으로 오르기가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동정하시는 예수님만이 겸손으로 가는 험난한 길을 도우실 수 있는 분입니다.
BIBLIOGRAPHY:
https://sermonwriter.com/biblical-commentary-old/hebrews-412-16/
https://sermonwriter.com/biblical-commentary-old/hebrews-51-10/
볼드체의 영문 번역은 WEB 영어성경에 기반한 저의 개인 번역입니다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구절 위 코멘트 중 존칭어의 텍스트는 저의 개인 멘트이고, 청색 텍스트의 반어체는 인용, 번역 및 수정 문구입니다.
인용 중 재인용은 이텔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예: 성경, 외국 학자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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