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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성경묵상

데살로니가전서(1 Thessalonians)4:13-5:11(죽의 자의 부활과 주의 날)

by 미류맘 2022.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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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교회가 염려하는 죽은 성도들에 대해 그들은 '잠든 것'이라고 말하며 예수의 재림 때 그들과 함께 남은 자들이 같이 일어날 것임을 확언합니다. 그리고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올 것이기 때문에 "잠들지 말고, 깨어 정신을 차려라!" 명령합니다.

 

13. But I do not want you to be ignorant, brethren, concerning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lest you sorrow as others who have no hope.

주의 강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4:13. 죽은 자들은 '잠든 것'

13. 그러나 형제 여러분, 잠든 사람들에 대하여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것을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잠든 사람들에 대하여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것: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함께 한 동안 예수의 강림에 대해 강조했고 그들은 진정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뒤 그들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죽은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앞으로 올 위대한 미래의 사건과 축복을 놓치게 되는가?" 

한 학자는 바울의 편지에서 무엇인가에 대해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표현을 네 번 사용한다고 말합니다. 영문으로는 'be ignorant, be unaware, not be informed'입니다: 

  •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 (롬 11:25).
  • 신령한 것에 대하여 (고전 12:1).
  • 기독교인의 삶에서 환난과 시련에 대하여 (고후 1:8).
  • 예수님의 재림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살전 4:13)

잠든 사람들: 사실 우리에게도 이 죽음 이후의 영역은 바울의 염려대로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 세계입니다. 당시 고대에서는 '죽음'을 '잠'으로 표현했고 이교도들 사이에서는 항상 '영원한 잠'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고대 문헌은 죽음에 대한 비관론을 기록합니다 (아래): 

  •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부활은 없다." (Aeschylus)
  • "희망은 산 자 가운데 있고, 죽은 자는 희망이 없다." (Theocritus)
  • "태양은 지고 다시 떠오를 수 있지만, 우리의 짧은 빛이 한번 지면 우리는 끝없는 밤을 자야 한다." (Catullus)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이라고 불렀지만, 그들은 휴식의 개념을 강조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매장지를 "기숙사" 또는 "잠자는 장소"를 의미하는 "묘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경은 믿지 않는 사람의 죽음을 잠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죽음에는 휴식, 평화 또는 위안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도록: 이 몸을 떠나는 것은 낮잠을 자기 위해 누워서 영광 속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움직이는 것이지, 죽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소망이 없는 사람으로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죽어서 소망이 없으면 앞에서 쓴 것처럼 우리는 흥분과 오락의 종교에 빠져들게 됩니다. 어차피 잠시 살다 갈 인생 순간의 스릴과 즐거움을 위해서 현재를 살게 됩니다. 그냥 오늘 하루 재미있으면 되는 하루살이 인생을 살기를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산다면 기독교인과 다른 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미래의 평안을 바라보고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은 복이 있습니다. 바울이 앞에서 말했듯이 '조용하게 살기를 힘쓰고, 자신의 일에 전념하고, 자신의 손으로 일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기독교인들의 죽음을 슬퍼하되 우리의 슬픔은 긴 여행을 떠나는 누군가를 배웅하는 슬픔과 같아야 합니다. 그들을 다시 볼 것을 알고 있지만 오랫동안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14. For if we believe that Jesus died and rose again, even so God will bring with Him those who sleep in Jesus.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4. 예수 안에서 잠자는 사람들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잠자는 사람들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다면, 그렇게 바울은 마음이 괴로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잠자는 사람들을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을 확언합니다. 학자는 '예수의 재림 때, 죽은 신자들을 데리고 오실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들도 예수님이 임재하는 날 같은 환희를 볼 것임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잠자는 사람들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살전 4:14)

그리고 바울은 죽은 신도들은 '잠든 것'으로 말하지만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삶은 최악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잠'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예수 시대의 사도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재림을 못 보고 죽은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단지 잠일뿐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면 삶은 그저 죽음을 향한 짧은 여정일 뿐일 것입니다. 학자는 말합니다:

죄인이 죽으면 우리는 그들을 위해 슬퍼한다. 믿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을 위해 슬퍼한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시편 4장 8절을 인용한 가장 흔한 기독교 비문 중 하나는 평화로움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 4:8) 우리는 그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죽음을 바라봐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기독교인들조차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죽음에 대해 같은 두려움과 절망감을 가지고 있다. 


15. For this we say to you by the word of the Lord, that we who are alive and remain until the coming of the Lord will by no means precede those who are asleep. For the Lord Himself will descend from heaven with a shout, with the voice of an archangel, and with the trumpet of God. And the dead in Christ will rise first.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데살로니가전서 4:15-16.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이 먼저 일어날 것이다!

15.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살아 남아 있는 우리는 잠든 사람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 16. 주께서는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가운데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주님의 말씀으로: 바울이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는지 기록되지 않은 예수의 말씀인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마치 계시를 자신의 눈으로 본 것처럼 자신 개인이 아닌'주님의 말씀으로' 말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 먼저 잠든 사람들이 우선될 것을 확신합니다. 

주께서는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가운데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내려오실 때 호령(고함, shout)을 하시며 내려오실 것이다. 여기서 고함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 단어는 선장이 자신의 노 젓는 사람들에게 하는 명령이나 장교가 자신의 병사들에게 하는 명령에 사용되는 것과 같은 단어이다. 

우리는 그 소리가 (호령, 목소리, 나팔) 실제의 청각적 소리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황홀함은 조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회심하기 전 사울이었을 때 그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가 다마섹 성도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섹으로 가는 중 밝은 대낮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심하게 됩니다. 그의 동료들은 음성을 들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 하고 서 있더라." (행 9:3-7)

환희에 동반되는 주님의 호령/대천사의 목소리/하나님의 나팔소리도 같은 효과를 낼 것이다. 온 세상이 이 천상의 소리를 듣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팔소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모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바울은 주님이 임재하시는 날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부활이나 주님의 임재에서 빠지지 않고, 먼저 그 일을 경험할 것임을 그는 확신합니다.


17. Then we who are alive and remain shall be caught up together with them in the clouds to meet the Lord in the air. And thus we shall always be with the Lord.
18. 
Therefore comfort one another with these words.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데살로니가전서 4:17-18. 우리와 예수님의 만남

17. 그 후에 살아남은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십시오.

여기에서 바울의 글은 너무 직설적이어서 마치 실제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장면 같기도 한 이 극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통해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마치 체포되듯 하늘로 '이끌려 올라가서(caught up)'  구름 속에서 주님과 만나는 신화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끌려 올라간다는 말은 반 강제성이 있는 단어입니다. 신도들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의지로 붙들려 올라갑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7)

바울의 설명에 의하면 죽은 자들이 먼저 올라가고 살아남은 자들이 그들과 올라가서 공중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 장면을 말하는 '환희(rapture)'란 신약 교리의 기초가 됩니다. 칠년대환난(七年大患難, the great tribulation for seven years)은 세상 끝날에 7년간의 대환난이 있을 것이라는 요한계시록의 증언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 마지막 7년 기간에 대한 논쟁이 많은데, 대환란을 기준으로 pre-, mid-, post-로 나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세계 종말론에 관계없이, 바울이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자나 살아 있는 자나 우리 모두는 항상 주님과 함께 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큰 축복이고 보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십시오: 우리는 주님과 항상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서로 위로하라!' 그리고 '서로 격려하라'라고 권면합니다.


1. But concerning the times and the seasons, brethren, you have no need that I should write to you.
2. For you yourselves know perfectly that the day of the Lord so comes as a thief in the night.
3. For when they say, “Peace and safety!” then sudden destruction comes upon them, as labor pains upon a pregnant woman. And they shall not escape.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1-3. 도둑같이 오시는 주님

1. 그러나 형제 여러분,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분께 더 쓸 필요가 없습니다. 2. 주의 날이 밤에 이렇게 도둑 같이 온다는 것을 여러분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때에, 임신한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들은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분께 더 쓸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불과 몇 주 동안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어떻게 올 지를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마 16:3)

주의 날이 밤에 이렇게 도둑 같이 온다는 것: '주의 날'은 하나님의 시간(때)입니다. 사람에게 사람의 '날'이 있듯이, 주님에게는 '주의 날'이 있습니다. 그 날은 예수님이 땅과 원수를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고, 영광으로 돌아오시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밤에 도둑이 오듯 갑자기 올 것입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하고 말할 때,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날에 대해 학자는 설명합니다:

  • "모든 것이 좋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안전하다"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 (Moffatt)

  • 많은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말하는 이때가 갑자기 찾아오는 것은 마태복음 24장 15-35절에 묘사된 예수의 재림과 구별되어야 한다. 그곳에서 묘사된 예수의 재림은 누구도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말할 수 없는 세계적 대재앙의 때에 일어난다.

임신한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해산의 진통이라는 구절은 필연성과 의외성을 동시에 암시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8절에서 세상 종말 이전의 재앙을 말 그대로 해산의 진통의 시작인 슬픔의 시작으로 말씀하셨을 때 같은 생각을 사용하셨다. 그 생각은 새로운 시대를 낳는다는 것과 이러한 재난에 대한 강도와 빈도의 증가를 암시하는 것이다.

트랩은 임신한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에 대해 말한다: "1. 확실히, 2. 갑자기, 3. 불가피하게, 필연적으로."


4. But you, brethren, are not in darkness, so that this Day should overtake you as a thief.
5. You are all sons of light and sons of the day. We are not of the night nor of darkness.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데살로니가전서 5:4-5. 우리는 빛과 낮의 자녀들입니다!

4.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날이 여러분에게 도둑같이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5.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고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의 자녀이고 낮의 자녀로 만드셨기 때문에, '주의 날'이 와도 그들은 그날을 위해 준비되어 있을 것임을 - 따라서 밤에 도둑같이 덮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들을 안심시킵니다. 또는 빛의 자녀이고 낮의 자녀로 사는 신자들에게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날의 때와 시기에 대해 알지 못하더라고 그날이 밤에 도둑처럼 올 것을 알기 때문에 도둑에 대한 준비 속에서 오늘을 살아갑니다. 도둑은 시간을 알리고 찾아오지 않듯이 예수님도 언제 돌아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들이 아닌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을 편지는 "만약 우리가 어둠 속에 있다면"이란 전제하에서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편지일 수도 있습니다.


6. Therefore let us not sleep, as others do, but let us watch and be sober.
7. For those who sleep, sleep at night, and those who get drunk are drunk at night.
8. But let us who are of the day be sober, putting on the breastplate of faith and love, and as a helmet the hope of salvation.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데살로니가전서 5:6-8. 바울의 권면: 잠들지 말고, 깨어 정신을 차려라!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깨어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7. 잠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자들도 밤에 취합니다. 8.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들이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씁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깨어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살전 5:6, 이미지 소스: https://wakeupandpray.podbean.com/)

그러므로... 잠들지 말고: 그래서 잠들지 말고, 의식적으로 깨어서, 정신을 차릴 것을 바울은 명령합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잠은 죽음이라고 말했습니다 (4:13-15). 학자는 말합니다: "이것은 4장 13-15절에 나오는 죽음의 잠이라는 뜻과는 다른 말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도덕적, 정신적 해이함 또는 무감각함을 포함한다." (Hiebert)

은 세상(다른 사람들)에 속하지만 기독교인에 속해서는 안 되는 많은 것을 말한다:

  • 잠은 무지를 말한다.
  • 잠은 무감각함을 말한다.
  • 잠은 무방비를 말한다. 
  • 잠은 비활동을 말한다.

"정신을 차리라(sober)"는 말은 문자적으로 술 취하지 않고 깨어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학자는 말합니다:

이것은 유머가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물의 적절한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 너무 흥분하지 않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다. 재미와 오락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정신이 멀쩡하지 않다. 그런데

바울 자신은 예수의 열정적인 추종자였고 종교적 광신으로 고발되었다. 로마의 관리 베스도는 바울이 미쳤다고 생각했고(머 26:24),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후 5:13).

깨어있음을 명령한 바울 자신은 정신이 멀쩡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미칠 정도록 사랑하여 스스로 말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 5:13)

잠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자들도 밤에 취합니다: 영적인 깨어있음의 반대는 영적인 수면이다. 영적인 술 취하지 않음의 반대는 영적으로 취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낮에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날의 존재이며, 따라서 우리는 깨어서 정신을 차려야 한다.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씁시다:  마치 군인이 갑옷과 투구로 완전무장하고 적진에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듯이, 바울은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소망의 투구를 쓰고 영적 전쟁이 임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심장(마음)을 보호하고 (미래에 대한) 소망은 머리(생각)를 보호하는 상징적인 도구입니다.


9. For God did not appoint us to wrath, but to obtain salvation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10. who died for us, that whether we wake or sleep, we should live together with Him.
11. Therefore comfort each other and edify one another, just as you also are doing.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9-11. 서로 위로하고 권면하라!

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노하심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도록 정하신 것입니다. 10.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그와 함께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듯이, 서로 위로하고, 서로 덕을 세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노하심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의 소망을 갖기 전에(5:8) 우리는 하나님 진노의 대상이었지만, 이제 그 진노의 대상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는 대상이 되었음을 바울은 선언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육신과 사탄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 이유를 학자는 하나, 아담의 원죄로 인해, , 우리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며, 예수님이 이 죄를 우리를 위해 대속하셔서(우리를 위해 죽으심) 진노의 대상이 구원의 대상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그와 함께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통해 구원을 받은 우리는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살든 죽든) 우리는 항상 예수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죽으심은 수면이 아니고 죽음이었고, 우리의 죽음은 수면으로 말합니다.

서로 위로하고, 서로 덕을 세우십시오: 바울은 다시 서로에게 위로하고 덕을 세우라(edify)고 권면합니다. 덕을 세우는 것은(교화하다, edify) 세우다(build up)이라고 학자는 부연 설명합니다. 예로 교회 안에서 서로 세우는 것은 신자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권면하고 다른 공동체로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지금 그렇게 하듯이 계속하라고 권면합니다. 아니면 충고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날씨가 세월이 흘러감을 말해줍니다. 저희 아이가 불안해서 지난 주 교회를 빠졌습니다. 교회에서 또 다른 일주를 시작합니다.

BIBLIOGRAPHY:
https://enduringword.com/bible-commentary/1-thessalonians-4
https://enduringword.com/bible-commentary/1-thessalonians-5
개역개정 아래의 볼드체 성경구절은 WEB 영어성경에 기반한 저의 개인 번역입니다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구절 위 코멘트 중 존칭어의 텍스트는 저의 개인 멘트이고, 청색 텍스트의 반어체는 인용, 번역 및 수정문구입니다.

인용 중 재인용은 이탤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예: 성경, 외국 학자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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