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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성경묵상

전도서(Ecclesiastes)1:1-11(헛되고 헛된 인생)

by 미류맘 2022.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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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는 '모든 것이 헛되다!'로 전도서를 시작하며, 해 아래에서의 모든 사람의 수고가 의미가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리고 끝없는 창조의 순환과 인간 노동의 순환의 허무함을 고백하고 '해 아래 새 것은 없다'라고 선언합니다.

 

전도서 1:1-3. 결론: 헛되고 헛된 인생

개역개정

모든 것이 헛되다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NKJV 영어 버전 개인 번역
1. The words of the Preacher,
The son of David, king in Jerusalem.

2. “Vanity of vanities,” says the Preacher;

“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y.”

3. What profit has a man from all his labor

In which he toils under the sun?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다.


2.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사람의 수고가 무슨 유익이 있을까?

전도자의 말씀 (1절): 전도서는 '전도자 소개의 글'로 시작합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의 말씀이다' 이 구절로 솔로몬을 저자로 보나 확실치 않다고 합니다. 솔로몬을 저자로 볼 경우 솔로몬 통치 말년(BC 940-930)의 기록시기로 보는데, 솔로몬이 젊은 날 범죄 하다가 노년이 되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던 시기였습니다 (자료참조: 라이프성경사전)

그럴 경우 모든 것이 헛되다로 시작하는 전도서가 솔로몬의 저작이 맞을 수도 있다는 추론입니다. 어제 오전에 전도서 1장을 번역하다가 기운이 빠져서 멈추고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이토록 절망적인 말을 거침없이 내뱉을 수가 있을까? 마치 허무주의, 운명론, 무신론에 빠져 있는 사람의 독백과도 같이 들리는 이 책은 분명히 무신론자가 쓴 책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만 '주님(Lord)'이라는 신성한 이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처음의 구절에서 "과연 저자는 자신의 허무함과 하나님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자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전도서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변증법의 에세이이다. 그것은 대안의 암울함을 지적함으로써 관대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삶을 변호한다." (Eaton)

전도자(Preacher): 전도자, 또는 설교자로도 번역되는 이 직함에 대해 '설교자, 연사, 대변인, 철학자, 선생 등 다양한 번역 시도가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설교자의 말씀이지만 성경에서 늘 발견하는 호칭인 '하나님, 여호와, 주님'의 호칭이 사용되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 이스라엘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전도자의 말을 듣고 그 말씀과 하나님을 연결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헛되고 헛되도다 (2절): 전도자(설교자)는 결론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이 구절은 전도서의 주요 주제 중 하나로, 이 짧은 책에서 약 30번 언급됩니다. 우리는 어떤 목사님이 설교단에 서서 신도들에게 '인생은 허무하며, 아무 것도 아니고, 쓸모없고, 무의미하다!'라고 설교를 시작한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전도서 설교자는 그렇게 설교를 시작합니다. '헛되다'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Hevel'은 '구름, 수증기'를 뜻합니다. 담배 연기처럼 고체이지만 잡힐 듯 말 듯, 잡을 수 없는 인생의 덧없음과 비슷한 실체입니다. 이 책의 절망적인 주제에 대해 학자는 말합니다: 

  • "한 점의 수증기, 한 줄기 바람, 한 번의 숨 – 당신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제로에 가장 가까운 것. 그것이 이 책이 말하는 '허무함'이다." (Kidner)

마치 전도자는 우리가 두려워서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있지 못하는 우리의 밑바닥에 깔린 (자살로도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정서를 철저하게 까발리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내면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데 있어서, 그의 고백은 오히려 기만적이지 않고 솔직합니다. 그가 이 책을 시작하는 주제는 우리 인간이 그래야 한다는 것(as to be)이 아니라 팩트가 그렇다는(as it is) 진술입니다. 그러나, 그의 절망에는 조건(전제)이 있습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사람의 수고가 무슨 유익이 있을까? (3절): 그 대상은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전도서에서 이 주제만 25번 이상 반복됩니다. 해는 무의미하게 수고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물질적인 지상을 비춥니다. 그리고 해는 로봇처럼 무의미하게 왔다 갔다 하는 인간들을 조롱하는 것 같습니다. 전도자는 해 위의 영적인 세상과 영적 존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점은 지상, 물질적인 것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택된 이스라엘 땅 위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의 허무함은 보편적인 세상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해 아래에는 허무하고, 덧없고 무의미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고, 해 위에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 지상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해(태양, sun)는 물질과 영혼의 경계선입니다. 해 아래에서의 삶을 학자들은 말합니다:  

  • "우리는 모두 불이 난 집에 살고 있고, 소방서에 연락할 수 없고, 나갈 방법도 없고, 우리가 갇힌 채로 불이 집을 태워버리는 동안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위층 창문만 있을 뿐이다." (극작가 Tennessee Williams)

  • 인생은 정어리 통조림과도 같아서, 우리 모두는 나갈 수 있는 열쇠를 찾고 있다." (극작가 Alan Bennett)

'수고와 유익'은 우리 세상사의 상업 용어입니다. 노력(노동; efforts, labor)을 하면 그 대가로 우리는 유익(이익; profit, gain)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그 수고와 유익도 공정하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힘든 저자에게는 수고하지 않고 유익을 얻는 사람들이 눈에 가시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학자는 마가복음을 인용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세상을 얻고 자기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마 8:36)

저자는 육체만 생각하고 있고 영혼은 생각하고 (아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유익을 얻고 자신의 영혼을 잃으면 저자가 말하는 '무의미, 허무함, 덧없음'이 있을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전도서 1:4-7. 끝없는 창조의 순환

개역개정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NKJV 영어 버전 개인 번역

4. One generation passes away, and another generation comes;

But the earth abides forever.

5. The sun also rises, and the sun goes down,
And hastens to the place where it arose.

6. The wind goes toward the south,
And turns around to the north;
The wind whirls about continually,
And comes again on its circuit.

7. All the rivers run into the sea,
Yet the sea is not full;
To the place from which the rivers come,
There they return again.
4. 한 세대가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5. 해는 뜨고, 해는 지고,
그 떴던 곳으로 서둘러 돌아간다.

6. 바람은 남쪽으로 불다가,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며,
바람은 이리저리 돌아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간다. 

7. 강물은 모두 바다로 흐르지만,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강물은 온 곳으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다시 돌아온다. 

한 세대가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4절): 전도자의 시선은 해 아래의 세상에 머물러 있습니다. 땅 위의 세계는 땅만 영원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인간, 해, 바람, 강물'은 돌고 도는 무의미하고 덧없는 순환을 반복합니다. 그 무한한 순환의 사이클에서 인간은 출생과 죽음을 반복합니다. 저자는 회의합니다.

이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 무의미하다, 헛되고 헛되다!

구약에서 창조는 하나님의 걸작품이고 또한 그의 피조물인 인간의 찬양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전도자에게 창조는 무의미한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의미 없는 창조의 순환을 보는 그는 피곤할 따름입니다. 창조의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창조물의 순환은 기쁨으로 변하게 됩니다. 학자는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기쁨의 강들이 여러분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 갈 수 있지만, 결코 그 강들은 여러분의 마음을 채우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은 물러날 수도 있고, 말라버릴 수도 있고, 썰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은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영원히 반복되는 기쁨이 있다... 우리는 새로운 기쁨을 위해 그의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분을 아는 것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는 비밀을 소유하는 것이다." (Meyer)

세상의 강은 무의미하게 돌고 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의 강물로 우리 마음을 채운다면, 그 강은 넘치는 평화와 기쁨의 존재로 바뀔 것을 학자는 말합니다.


전도서 1:8-11. 인간 노동의 끝없는 순환

개역개정

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NKJV 영어 버전 개인 번역

8. All things are full of labor;

Man cannot express it.
The eye is not satisfied with seeing,
Nor the ear filled with hearing.

9. That which has been is what will be,
That which is done is what will be done,
And 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

10. Is there anything of which it may be said,
“See, this is new”?
It has already been in ancient times before us.

11. There is no remembrance of former things,
Nor will there be any remembrance of things that are to come
By those who will come after.
8. 만물이 수고로 가득함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고,
귀는 들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9. 이미 있던 것이 앞으로 있을 것이고,
이미 한 일을 앞으로 다시 해야 한다.
그리고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10. 무엇을 가리켜 "보라, 이것이 새 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우리보다 앞서 있었던 것이다.

11. 이전 세대에 대한 기억이 없듯이,
앞으로 다가올 세대도
그 후에 올 세대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만물이 수고로 가득함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8절): 8절의 영어 번역은 (KJV: labor, 다른 버전: weariness) '수고'와 '피곤함' 두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수고로 가득한' 또는 '피곤함으로 가득한' 인생을 전도자는 푸념합니다. 그 말만 듣는 것도 피곤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전도자의 시선은 '해 아래 모든 피조물'로부터 '인간의 수고'로 향합니다. (몸으로) 수고하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만족) 채워지지 않는 현실에 절망합니다. 마치 다람쥐가 채바퀴를 돌듯 돌아도 돌아도 제 자리로 오고, 빨리 달려도 결과는 같지만 더 수고해야 하고... 마치 인생이란 죽음이라는 결승점에 도달하기 위해 운명적으로 해 아래에서는 끝없는 마라톤을 달려야 하는 절망적인 마라토너와도 같습니다. 변하는 것은 나이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절망합니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9절)

이전 세대에 대한 기억이 없듯이... 그 후에 올 세대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11절): 수고, 피곤함도 대물림 되듯이 망각도 대물림 됩니다. 순간적으로 살아갈 우리의 삶은 기억에서 잊힐 것입니다.

그리고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전 1:9, 이미지 소스: https://therichword-blog-blog.tumblr.com/)

전도자의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절망의 메시지 속에는 위 이미지의 메시지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제외하고'라는 강한 메시지를 읽어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서 저자의 의도가 아닐까요? 그는 문제만 제기하고 답은 독자들에게 열어두고 있습니다.

 

BIBLIOGRAPHY:
https://enduringword.com/bible-commentary/ecclesiastes-1/
개역개정 아래의 볼드체 성경구절은 NKJV 영어성경에 기반한 저의 개인 번역입니다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구절 위 코멘트 중 존칭어의 텍스트는 저의 개인 멘트이고, 청색 텍스트의 반어체는 인용, 번역 및 수정문구입니다.

인용 중 재인용은 이탤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예: 성경, 외국 학자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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