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용감한 사람들이여, 오래 전부터 우리는 하나님 이외의
그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을 것을 결정했습니다"
2017년 2월 12일(일) 2: 유대인들의 최후의 요새화되었던 보루 마사다
요새화되었던 유대인의 최후의 보루 마사다 국립공원(Masada National Park)을 찾았습니다.
그 옛날의 피비린내 나는 항쟁을 생각하면 국립공원이란 단어가 낯설기만 하네요.
이스라엘 남부의 암층 지대에 위치한 고대 요새인 마사다의 높이는 해발 기준으로 보면 40m에 불과하지만 인근 20m에 있는 사해가 해수면보다 400m 낮기 때문에 실제 요새의 높이는 440m 정도이며, 서쪽 절벽은 약 90m로 매우 가파른 난공불락의 지형이다. 요새를 둘러싸고 있는 방호벽은 1.3km이며 방호벽의 평균 높이는 3.7m이다. 방호벽에는 감시를 위한 망루들이 있으며 내부에는 창고, 병영, 병기고, 궁정, 저수조 등이 있다.
마사다 (Masada מצדה metsada "fortress") 국립공원은 사해(死海, Dead Sea)가 내려다 보이는 바위투성이의 고원지대 꼭대기에 자리잡은 고대의 요새이다. 사해(염해)와는 20km 떨어져있다. 헤롯대왕은 BCE 31 – 37년 사이에 산 위에 성을 건축하고 요새화하였다. 현재 마사다는 이스라엘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장엄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이 유적은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상징이었다. 73년 로마군의 공격에 맞선 유대 저항군은 이곳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이다 최후를 맞았다. 유대의 헤롯 왕(Herod, 기원전 37년〜기원후 4년 재위) 때 초기 로마 제국의 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설한 왕궁 터가 남아 있다. 왕궁을 둘러싼 병영과 요새, 공격 램프(ramp, 건축물로 진입하기 위해 만든 경사로)는 로마 제국의 공성 보루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가장 완전한 유적이다.
유대가 로마의 속주가 된 뒤 마사다는 생존한 유대 저항군의 마지막 피난처였다. 이들은 로마군이 마지막 방어선을 뚫고 진격해 들어왔을 때 노예가 되기보다는 자살을 택했다. 그로써 마사다는 유대인에게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곳이 되었다. 마사다는 또한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궁전의 터는 이런 종류의 건축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로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공성 보루들은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로마 제국의 유적이다.
특히 수도 시설은 특히 정교해서 단 하루 동안 내린 빗물을 모으면 2〜3년 동안 1,000명에게 식수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성취 덕분에 황폐하고 고립되고 메마른 구릉지를 풍요로운 궁전 휴식처로 바꿀 수 있었다. 거대한 성벽으로 더욱 튼튼하게 요새화된 이 천혜의 방어 유적은 로마 제국 통치에 반대한 유대 저항군이 차지했으나 마침내 막강한 로마군의 포위 공격을 받기에 이른다. 유적을 둘러싼 병영, 공성 보루, 공격 램프와 사변형으로 된 고대 로마 군단의 요새망은 로마 제국의 유적으로는 가장 완전하다. 마사다는 압제와 자유 사이에서 인간이 벌인 끊임없는 투쟁의 통렬한 상징이다.
(참고 자료: 두산백과, https://en.wikipedia.org)
마사다 Main Entrance을 통해 들어갑니다.
Masada에 오르기 위해서는 아래 전시실을 통해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야 합니다.
마사다 고원 모형이 보입니다.
마사다 동쪽자락의 절벽은 약 400미터이고 서쪽절벽은 약 90미터이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전시실에서 바라보는 전경입니다.
마사다의 성벽과 내부 구조도 볼 수 있습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데 이스라엘 학생들이 단체로 왔네요. 유태인들 어릴 때부터 자신의 근본을 철저히 배우는 모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단체 학생들이 있어 케이블카에 40-50명은 탄 것 같습니다. 동영상을 찍었는데 버튼을 잘못 누른 것 같습니다. 흔적도 없네요.
케이블카에서 내려 내려다본 전망입니다.
성벽과 왼쪽은 망루인 모양입니다. 거의 파손되어 형체만 남아있네요.
오르는 길 예전에는 피비린내 났을 장소가 사해를 내려다보며 아름답기만 합니다.. Josephus Flavius의 이 성에서의 생활에 대한 설명문이 보입니다. 일부 발췌합니다.
요새화된 장소에서의 생활 (Life in the fortified place)
“이 성벽에는 매우 높고 튼튼한 6 큐빗(약 2.7m) 높이의 탑이 있었다. 헤롯은 다른 곳보다 흙이 비옥한 언덕의 꼭대기에 성을 세웠으며, 물 저장고로 사용하기 위해 많은 큰 구덩이들을 만들어 여러가지 용도로 물을 사용하였다."
위는 Northern Complex의 구조물인 것 같습니다.
역시 헤롯대왕은 건축의 귀재임에 틀림없네요. 정문에서 들어오면서 자신의 공간은 왼쪽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공간이 창고이고, 목욕탕은 중앙에, 그리고 성은 제일 뒤에 있습니다.
1. 채석장 / 2. 사령관 거주지 / 3. 정사각형의 정문 및 “사령관 본부”
4. 창고 / 5. 북쪽 궁전 / 6. 대형 목욕탕
7. “제비(lots)가 발견된 장소 / 8. 사각형의 북쪽 입구 / 9. 수문
위의 구덩이들은 물도 저장하고 식량도 저장했던 저장고가 아닐지...
마사다에는 비둘기가 많은데 실제 그 옛날의 비둘기장이 있습니다.
가운데 보이는 위에 철재로 난간이 쳐진 곳이 대형 목욕탕이라 합니다. 돌벽에 검은 선을 그어 놓은 것은 검은 선 아래는 원형 그대로이고
그 윗 부분은 바닥에 있는 돌들을 다시 쌓아서 복원한 부분이라는 설명입니다.
그 옛날 성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사해를 보며 15,000명의 로마군과 대치하면서 남은 960명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지요?
무너진 제2 궁전터
아래는 마사다에서 내려다본 동영상 전망입니다.
위는 당시 목욕탕에 대한 그림입니다. 요즘 목욕탕보다 더 좋은 듯... 목욕에 대한 설명이 있네요. 일부 발췌합니다.
로마식 목욕 (Bathing in Roman Style)
"목욕탕(bathhouse)는 사회적 기능 또한 가졌다. 목욕과 관련된 신체 활동들은 로마의 사회문화적 생활에 있어서 헤롯이 열망했던 중요한 요소였다. 이 오늘날 건식사우나를 연상시키는 복잡한 목욕 방식, 생생한 벽의 페인트와 색상이 있는 돌바닥은 당시 높은 생활 수준과 부유함과 헤롯이 자신의 궁전에 목욕탕에 부여한 중요성을 보여준다. 목욕은 건물의 내부에 있는 지붕이 있는 기둥으로 둘러싸인 방들에서 이루어졌다.
돌에 선을 그어 놓은 것은 선 아래 부분은 발굴당시 있던 부분이고 그 윗 부분은 새로 추가된 부분으로 근처의 돌등을 활용하여 고쳤다고 한다.
헤롯이 만든 로마식 전통 목욕탕은 놀랍습니다. 바닥과 벽까지 우리의 온돌시스템처럼 만들었네요.
목욕탕은 탈의실, 냉실, 온실 그리고 가장 뜨거운 열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목욕탕 바닥의 모자이크와 벽을 장식한 프레스코는 헤롯의 목욕탕에 대한 집념을 엿보게 합니다. 또한 바닥을 200여개의 작은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열탕은 아궁이의 뜨거운 열이 방바닥으로 그대로 전해지게 되어있고, 벽으로도 뜨거운 열기가 지나갈 수 있도록 파이프를 설치했으며, 뜨거운 공기가 골고루 순환할 수 있도록 천장은 둥글게 아취형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밖에도 수영장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http://blog.naver.com/juk4277)
바닥에
[출처] 마사다 유적지 로마식 목욕탕 |작성자 러브
마사다 항전 (Battle of Masada)의 기록에 의하면
"AD73년에 로마군이 성벽을 무너트리고 요새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지도자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는 적의 노예나 포로가 되기보다는
자결할 것을 호소해서 저항군은 집으로 가서 가족을 죽이고 다시 모여 열 사람씩 조를 짜서 제비뽑기를 통해 한 사람이 아홉 명을 죽이는 방식으로 죽음의 의식을 반복해서 치렀다.
최후의 한 사람은 전원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성에 불을 지른 후 자결했다. 결국 마사다에 입성한 로마군은 936구의 시신만을 보게 되었다.
이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지하 동굴에 숨어있던 두 명의 여인 뿐이었다. 이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함으로서 마사다 항전의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었다."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그 당시 발견되었던 "제비(lots)"가 발견된 장소와 제비 실물입니다.
그 옛날에는 길이 없었지만 관광지가 된 지금은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걸어서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걸어서 온 친구에게 물으니 1시간 반 걸렸다고 하네요.
Cistem, 물저장고입니다.
수로시스템 모델이 있었는데 사진을 못 찍었습니다.
“나의 용감한 사람들이여, 오래 전부터 우리는 로마인들에게도, 하나님 이외의 그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을 것을 결정했습니다.”
- Josephus Flavius -
당시 회당(Synagogue)에 대한 조감도와 설명에 의하면 마사다에서 저항군의 생활 방식은 공동체 회의와 율법(Torah)을 읽기 위한 적합한 건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건물은 헤롯 시대에 건축되었는데 항쟁 중 회당이었다 합니다.
앉을 수 있는 의자, 기둥, 벽 정도 남아있네요.
비둘기집입니다. 지금은 까마귀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면 "왜 헤롯은 산 위에서 비둘기를 키웠을까"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마사다에는 3개의 비둘기장이 있었다. 앞에 있는 하나는 바닥에 있는 비둘기장으로 사용되었고, 그 윗에 있는 망루로 사용되었고, 벽의 수백 개의 구멍에서 비둘기들을 사육했다. 비둘기 고기는 마사다의 주민과 손님들에게 제공되었고, 농작물을 위한 비료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당시에 그들은 비둘기를 키우며 통신용과 식용으로 사용하고, 얼마 안 되는 비둘기 고기도 먹고, 똥을 연료로 사용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한 것 같습니다.
당시 로마군과 접전 당시 산의 정상에 램프를 세운 것이 이 포인트라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저항군이 흙과 나무로 벽을 만들어 램프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답니다. 그 벽을 로마군이 횃불로 파괴하려 했으나 로마군의 얼굴로 북풍이 불어 실패했다고 합니다. 이 곳에서 돌을 발사하는 무기, 노포, 그리고 많은 화살촉들이 발굴되었다 합니다.
여기가 비잔틴교회가 있었던 장소이고 그 모형도입니다. 지금은 새들만 보입니다.
이것도 비둘기장인지... ?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식물이 신기하기만 하네요.
사진이 너무 많아 South Gate부터는 다음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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