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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성경묵상

요한일서(1 John)4:11-21(서로 사랑하라!)

by 미류맘 2022.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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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성도간의 사랑 실천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사랑의 본질을 말합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심판 날에도 담대하다고 확언합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전달합니다.

 

요한일서 4:11-13. 서로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다!

11. Beloved, if God so loved us, we also ought to love one another.
12. No one has seen God at any time. If we love one another, God abides in us, and His love has been perfected in us. 
13. By this we know that we abide in Him, and He in us, because He has given us of His Spirit.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개인번역)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해질 것입니다. 13.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11절):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주제를 계속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주시는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큰 사랑을 받은 우리는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12a절):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에 대해 썼습니다: "영원하고, 불멸하며, 보이지 않는 왕" (딤전 1:17).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하나님은 영이시다" (요 4:24)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는 볼 수 있는 실체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학자는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그의 모든 비밀을 알 수도 없다. 그는 우리의 능력 밖이다. 물론 성령님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성령님을 본 사람은 없다.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나타나셨지만,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12b절): 우리는 성도간의 서로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서로의 형제자매입니다. 그들은 공동체, 또는 가족으로서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 사랑 실천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해질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이 온전하다'는 영어로 'love has been perfected'로 번역하였는데, 그리스 단어 teleioo는 "완전한(perfect)"을 의미하지 않고 "성숙한(mature), 온전한(complete)"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성도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성숙해 지고 온전해 진다'는 의미입니다. 시제는 현재 완료인데 번역은 현재로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온전해졌다 - 현재에 온전하다/성숙해 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By this),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13a절): 요한은 지금가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형제, 이웃, 성도간 사랑을 실천함으로 (이것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요한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나는 안다!"라고 선언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나는 알고 싶다! 알기를 소원한다!" 일까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일방적으로 퍼주는 한방향이었는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거하는(사는) 것은 양방향입니다. 게임으로 보면 공평하지 않습니다. 주는 사람 따로 있고 받는 사람 따로 있는데, 누리는 것은 양쪽 다입니다. 그러나 후자(누리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일방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 우리가 얻는 것은 많은데,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어 기뻐하시는 것 외에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얻는 것이 있을까요? 학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 15: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하나님은 농부, 예수님은 참포도나무, 우리는 가지이고 우리에게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방법 중 하나는 그의 생명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13b절): 무슨 의미일까요? 학자의 말을 인용합니다.

  • 요한은 여기에서 성령을 일하심을 두 가지 중요한 연결을 위해 끌어낸다. 첫째,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이며, 그 영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존재이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증언이다. 바울은 말한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하신다" (롬 8:16).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확신을 주신다.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성자 예수님만 육신으로 볼 수 있고, 성부 하나님과, 성령은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일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4:14-16. 우리는 보았고 증언한다!

14. And we have seen and testify that the Father has sent the Son as Savior of the world.
15. Whoever confesses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God abides in him, and he in God.
16. And we have known and believed the love that God has for us. God is love, and he who abides in love abides in God, and God in him.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개인번역)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면, 하나님은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16.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았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살고, 하나님은 그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4절): 여기에서 '우리'는 저자를 포함하여 예수를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주이신 예수를 보았고 아래의 세 가지 본질적인 진리를 선언한다: 

  •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
  • 그(예수)는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졌다.
  • 예수님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그분 안에 머무르는 기초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면, 하나님은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았고 믿었습니다 (16절): 요한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고백(인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경험으로) 알고, 믿는 것으로 응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일서 4:17-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17. Love has been perfected among us in this: that we may have boldness in the day of judgment; because as He is, so are we in this world.
18. There is no fear in love; but perfect love casts out fear, because fear involves torment. But he who fears has not been made perfect in love.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개인번역)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그러신 것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럴 것입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고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7a절): 사랑으로 온전하게 된 우리를 확인하면서, 요한은 이는 다가오는 심판 날을 준비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날, 우리는 태연하게 심판대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까요? 준비를 해야 한다고 요한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요한이 말하는 대로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온전해져야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그러신 것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럴 것입니다 (17b절): '그러신 것 같이... 그럴 것' - 어떤 의미일까?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또한 우리도 이 세상에게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새번역) 시제는 둘 다 현재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오른쪽에 앉아서 대담하시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대담하게 살기 때문이다?  맞는 해석일까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18절): 이 두려움(fear)과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두려움은 다른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요한이 여기서 쓰는 두려움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에 대해 가져야 할 적절한 경외심이 아니라, 고통을 수반하는 두려움, 즉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혼에서 모든 기쁨과 자신감을 빼앗는 고통스러운 두려움이다. 심판의 날에 담대함과는 반대되는 두려움이다. (자료: Enduringword)

18절은 사랑과 두려움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즉, 경건한 사랑과 세상적인 두려움은 양립할 수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경외, 존경, 혹은 하나님 앞에서 떨리는 의미로 하나님을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요한의 초점은 하나님이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용서해 주실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에 맞춰져 있다. 하나님의 사랑의 예를 따르는 신자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으실까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의 완전한 사랑은 이 두려움의 필요를 없앤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시며, 믿는 사람의 마음에 사랑을 두시기 때문이다. (자료: Bibleref.com)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18b절)

 

학자가 설명한 대로 사랑과 두려움은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무장된 사람의 마음에는 두려움이란 들어올 여분의 장소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4:19.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

19. We love Him because He first loved us.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

(개인번역) 19.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19절): 영어로는 8단어, 우리로 시작하는 너무도 짧은 진술, 또는 고백입니다. 학자는 말합니다: "찰스 스펄전은 여덟 단어만으로 다섯 가지 놀라운 설교를 했다"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요? 두려워하지 않고 선언할 수 있을까요?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스퍼전은 그의 설교에서 믿음이 먼저이고 사랑이 믿음의 열매라고 말했습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예수를 믿고, 믿으면 사랑이 열매로 다가온다. 사랑은 결코 뿌리가 아니다. 믿음만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Spurgeon)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그의 생각의 흐름을 따르면 구원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속죄를 위해 예수를 믿으면, 사랑은 보너스로 따라온다. 그러면 구원은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속죄를 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왜 나에게 죄가 있어?" 반항하며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믿고 사랑하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순서가 좋을 듯도 합니다. 도식화하면,

믿음 (뿌리: 속죄를 위해 예수를 믿음) ⟶ 사랑(열매) ⟶ 구원

이미지 소스: https://twitter.com/PursuitSTL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어순을 바꾸면,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요한일서 4:20-21. 주님의 계명: '서로 사랑하라!'

20. If someone says, “I love God,” and hates his brother, he is a liar; for he who does not love his brother whom he has seen, how can he love God whom he has not seen?
21. And this commandment we have from Him: that he who loves God must love his brother also.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개인번역) 20.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21. 우리가 이 계명을 하나님에게서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면 (21절): 순서를 바꾸면 먼저 형제애를 실천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즉,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 구절들은 먼저 필리아(philia)-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가페(agape)-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Boice)

학자는 성경을 인용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의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4장을 끝냅니다. 

 

BIBLIOGRAPHY:
https://enduringword.com/bible-commentary/1-john-4/
https://www.bibleref.com/1-John/4/1-John-chapter-4.html
개역개정 아래의 볼드체 성경구절은 NKJV 영어성경에 기반한 저의 개인 번역입니다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구절 위 코멘트 중 존칭어의 텍스트는 저의 개인 멘트이고, 청색 텍스트의 반어체는 인용, 번역 및 수정문구입니다.

인용 중 재인용은 이탤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예: 성경, 외국 학자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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