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를 보니 교회 다녀온 후 몽양 여운형 기념관을 다녀왔네요. 다녀온 후 체험기를 쓰지 않아서 4년이 지난 지금 쓰고 있습니다. 기념관에 소장님이 계셔서 좋은 말씀 듣고 왔습니다. 선생기념사업회 사이트에 의하면 영원한 청년 여운형 선생에게 ‘독립은 주어지지 않는 것이고 쟁취하는 것이다’ 라는 설명이 눈에 들어옵니다.
기념관 규모는 크지는 않지만 선생의 연대기별 삶과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선생의 삶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몸양은 북한을 다섯차례나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북한의 지도자는 그보다 26살 어린 김일성이었습니다. 지금 북한과의 교류를 생각해 보면 이런 선생이 있어서 지금이나마 북한과의 교류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대한민국 건국의 기반이 된 3.1운동을 기획한 선생의 평생은 독립과 통일로 일관된 삶을 살았습니다. 여운형기념관이 양평에 있게 된 동기는 선생의 고향이 양평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선생의 기독교 활동 또한 활발하였습니다. 선생이 62세 때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살될 때가지의 발자취를 보면 투쟁의 인생을 사시다 가셨네요. 1947년 최초의 ‘인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현재 광화문 사거리에서 동대문 운동장 장례식장까지 인파가 넘쳤다고.
많은 어록을 남긴 선생이 테러를 당했을 때 입은 옷과 혈흔을 보고 미류가 조금 섬찟한 모양이네요. 그리고 데드 마스크.
포토존도 있더군요. 선생의 어록도 보이는… 그 때 찍은 사진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요. 남북으로 나뉘어진 한반도와 좌우로 분열된 민족을 하나로 합치기 위해 노력했던 선생은 1945년 해방 후 피살되는 1947년 직후까지 두 달에 한 번꼴로(2년간 12차례) 테러를 당했다고 합니다.
결국 극우테러 조직원인 19세의 한지근이 쏜 총탄에 피살되고 시신은 포르말린으로 방부 처리되어 철제로 만들어진 관에 안치되었는데 이는 선생의 유언에 따라 통일이 되는 날에 다시 장례를 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자료: 양평군 뮤지엄 허브)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나게 되고, 대한민국은 드디어 독립을 성취하게 된다. 그해를 전후에 근대와 현대로 시대를 분리하기도 한다. 특히 1945년 이후부터 피살되는 1947년 직후까지 몽양여운형선생의 활동은 매우 활발하게 된다.
기념관 위로 올라가게 되면 선생의 생가가 나오는데 실제 선생이 속옷차림으로 앉아 면도하는 모습의 모형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영원한 청년 몽양여운형선생이 때를 잘 타고 났다면,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남북으로 나뉘어진 한반도와 좌우로 분열된 민족’의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자료를 찾아보니 기념관 위탁업체 선정문제로 시끄러운데 동네 새마을회에 위탁을 주려 한다는…
기념관 위에 복원된 선생의 생가를 볼 수 있는데 ‘ㄱ’자 모양의 생가는 1715년 처음 지어졌고 태어나서 서울로 이사 갈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6.25전쟁 때 소실되고 2001년 복원된었다. 선생이 사용했던 것 같은 오래된 가구와 농기구 등도 잘 진열되어 있다. 주방에는 주방기기들과 밥상도 잘 정리되어 있다. 마당에는 실제 사용했었는지 모르겠지만 떡방아(?)도 보인다. 생가에 전시된 가구들은 1930년대 이후 선생이 사셨던 서울 계동 집에 있던 것으로 후손들이 기증했다고 한다.(자료: 양평군 뮤지엄 허브)
몽양선생 같은 사람이 현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시대에 앞서서 태어난 것은 아닌지… 그 때 관장님에게 그 당시 여당 한나라당에서 방문한 적이 있냐고 물으니 웃으시면서 없다고… 미류가 팔 벌리고 있는 뒤의 구조물이 당시에 사용하던 닭장을 재현한 것 같다.
전시관은 4코너로 구성된다. 제1코너, 출생과 애국계몽운동(1886~1913), 제2코너, 독립운동(1914~1945), 제3코너, 건국준비활동과 좌우합작운동(1945~1947), 제4코너, 서거(1947.07.19)
외부에 있는 많은 핸드프린팅에 미류가 재미있는 모양이다.
많은 이름을 가진 몽양, 영원한 청년, 3.1운동을 기획한 선구적 실천가, 일제를 제압한 정의의 웅변가, 조선 건국을 준비했던 선견지명의 전략가, 진정한 민주주의자, 한 시대를 껴안은 조선의 거인…
몽양여운형기념관은 규모나 내용이 눈에 띄지는 않지만 아직까지 남북과 좌우로 갈린 한반도에 대하여 많은 것을 느끼게 하고 우리의 지금 모습과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장소였다.
자료를 검색하다가 ‘몽양어록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생전에 선생의 어록에서 발췌한 글을 새겨 놓은 16개의 바위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어록길은 방문시 볼 수 없었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자연스럽게 접근이 되는 것 같다.
어머니 이씨가 치마폭에 태양을 받는 태몽을 꾸었다 하여 몽양(夢陽)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하는 여운형선생의 묘는 생가 근처에는 없다고 하는데 한반도가 통일되는 날 다시 장례식이 있을지…
기념관을 방문하고 생가도 보면서 우리 동네 노문리의 ‘화서기념관’을 생각해 보았다. 양평의 아이콘으로 생각되는 화서기념관의 관리모습과 몽양기념관의 관리모습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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