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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성경묵상

이사야(Isaiah)43:1-13(두려워하지 마라)

by 미류맘 2021.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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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는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하나,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주의 종으로 세우셔서 주님의 역사하심의 증인이 되시기를 요청하십니다.

 

모두 66장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사야서는 '신구약성경의 축도(縮圖)’, ‘소(小)성경'으로 불릴 정도로 중요성을 인정받는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배경 지식이 부족하기도 하고 공부를 하다 보니 그 중요성이 인식되어 믿을만한 자료를 검색하면서 하나씩 풀어나가고 있는 퍼즐 같은 책입니다. '심판과 구원'이라는 큰 두 개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이사야서 중 40-55장은 바빌로니아 유배지의 종말을 다룬 책으로 제2의 이사야서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이사야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위로하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예루살렘에게 위로하여 말하고, 그들의 전쟁이 끝났고, 그 죄가 사함을 받았고, 여호와의 손에서 그들이 지은 죄의 두 배의 벌을 받았다'라고 외쳐라" (40:1-2)

이쯤에서 방대한 이사야서의 내용 중간점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의 글과 성경학자의 설명과 교차하면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아 래(인용 및 편집: sermonwriter 그리고 개인 멘트 포함) -

위 구절에서 언급된 벌은 망명이다. 예루살렘이 범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바빌로니아가 그들의 도시를 파괴하고 그들을 노예로 추방하도록 허락했다. 바빌로니아는 BC 587년에 예루살렘을 파괴했고 그 후 주민들을 유배시켰다. 50년이 지난 지금, 망명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대부분의 망명자들은 바빌로니아에서 감금되어 태어났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자기 성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들은 여호와가 진정한 신인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왜 여호와의 성전을 파괴하고 여호와의 백성을 추방하도록 바빌로니아인들에게 허용했는지 자문해 왔다. 그들은 여호와를 숭배함으로써 실수를 했는지 자문해 보았다. 아마도 바빌로니아의 신 마르둑(Marduk)은 여호와보다 더 강할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여호와 대신 마르둑을 숭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39장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이야기했다. 앗시리아가 세계를 지배하자, 유다의 아하스 왕은 예언자 이사야의 조언을 무시하고, 앗시리아의 티글라트 필레사(Tiglath-pileser)에게 유다가 이스라엘과 다마섹(다마스쿠스)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앗수르(앗시리아)는 그렇게 하기 위해 군인들을 보냈지만, 결과적으로 유다는 앗수르의 속국이 되었고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은 앗수르의 신들을 인정해야 했다 (열하 16:3-4).

이 역사 이야기를 역대하를 공부하면서 읽은 적이 있는데 위의 성경학자가 언급한 '티글라트 필레사' 왕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검색해 보았습니다. 성경의 기록입니다. 그의 이름은 성경에 '불(Pul)'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앗수르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 하매 므나헴이 은 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그로 자기를 도와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열하 15:19)

아모즈의 아들 이사야가 그의 사역을 시작한 것은 이 시기였습니다. 그는 이사야서 1장에서 '죄로 가득 찬 성읍'에 대하여 한탄합니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다!" (1:21), 그리고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1:23). 그는 2장에서 '여호와의 날'의 임재를 경고합니다: "그 날에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2:17)라고 경고하였다. 그는 아하스에게, 유다가 앗시리아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도움과 동맹을 구해야 한다고 조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하스와 예루살렘은 이를 무시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사야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 앞으로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사야서 전반부 1-39장에서 망명자의 책임이 예루살렘의 책임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그들은 창녀 노릇을 했다. 망명은 그들의 죄에 대한 처벌이다.

이제 이사야서 후반부 40-55장이 시작된다 (추정되는 저자는 이사야의 제자). 망명 막바지에 쓰인 후반부는 위로의 말로 시작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약속을 한다. 40-42:20까지는 희망적인 맥락에서 계속된다. 그리고 42:21-25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이 분노하신 이유는 백성의 죄악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조는 43:1로 다시 희망과 안심으로 바뀌는데, 이는 "그...러...나...(but)"라는 의미심장한 단어로 시작하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과 그들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재확인시켜 준다.

이 예언의 이행은 BC 539년에 바빌로니아를 물리치고 바사(페르시아)를 지배국으로 세운 바사의 고레스 2세를 통해 이루어졌다. 바빌로니아가 망명자들을 노예로 취급하는 동안, 고레스는 매우 다른 정책을 도입할 것이다. 그는 망명자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재건할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도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그 예언자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고레스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사람들을 구할 사람은 고레스가 아니라 하나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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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ut now Yahweh who created you, Jacob, and he who formed you, Israel says: “Don’t be afraid, for I have redeemed you. I have called you by your name. You are mine.
2.  When you pass through the waters, I will be with you; and through the rivers, they will not overflow you. When you walk through the fire, you will not be burned, and flame will not scorch you.
3.  For I am Yahweh your God, the Holy One of Israel, your Savior. I have given Egypt as your ransom, Ethiopia and Seba in your place.
4.  Since you have been precious and honored in my sight, and I have loved you; therefore I will give people in your place, and nations instead of your life.

구원의 약속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1.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시고 너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음이라. 내가 너의 이름을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 내가 너화 함께 할 것이고, 강을 건널 때 물이 너를 덮치지 못할 것이다. 불 속을 걸어도, 너는 타지 않을 것이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도 못할 것이다. 3.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너의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집트를 너의 속량물로, 너 대신에 에티오피아와 스바를 주었다. 4. 네가 내 눈에 소중하고 존귀하여, 내가 너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내가 너의 생명 대신에 백성과 민족들을 줄 것이다."

- 아 래(인용 및 편집: sermonwriter 그리고 개인 멘트 포함) -

그러나,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1a절).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구절의 "그러나"는 유다의 불복종과 하나님의 분노를 나타내는 구절인 42:21-25와 연결하는 전형적인 영어 접속사입니다. 이 구절에서 그 접속사를 사용하면서 시작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분노가 역사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43장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주제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백성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라는 말은 여기서 말씀하시려는 것에 대한 독자의 확인을 구하는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러나(but)'는 부정적인 느낌을 '이제(now)'는 긍정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풀어 말하자면,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 여호와는 너희 '내 종'된 이스라엘에게 이제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  이스라엘에게, 아니 우리에게 이사야는 '절망'과 동시에 '희망'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시고 너를 지으신 여호와” (1b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는 이스라엘을 세우셨다. 그 창조는 아브람의 부름으로 시작해서 (창 12:1) 이삭, 야곱/이스라엘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을 통해서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가족이 대규모로 성장한 것은 이집트에서였고, 그들이 처음으로 독립된 나라가 된 것은 출애굽기 당시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음이라” (1c절).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는 자주 나타나지만, 특히 이사야서에서 (15번) 특히 이사야 후반부 (10번)에는 자주 등장한다.

두려움은 인간의 일반적인 조건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반세기 동안의 노예 생활을 견뎌온 이 망명자들은 분명히 두려워할 이유가 있다. 그들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들은 영원히 바빌로니아의 노예로 있을 것인가? 그들이 언젠가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을까?

하나님을 대변하는 예언자 이사야는, 그들의 상황의 고통과 명백한 절망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미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그들에게 장담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는, "구원받은(redeemed)"이라는 단어가, 인간이든 동물이든, 첫 번째가 주님의 소유이며 대가를 치르면 반드시 보상을 받는다는 그들의 인식을 일깨워 줄 것이다. 이 관습은 유월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유월절에는 주께서 이집트의 맏아들을 죽였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그들의 문설주에 묻은 어린양의 피로 그들의 맏아들을 속죄할 수 있었다 (출 11:1-13:16).

내가 너의 이름을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라” (1d절). 사람들에게 이름은 중요하다.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과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들의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는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바꾸었다.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창 17:5) 그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었다.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 32:28) 그리고 이스라엘의 이름이 나라의 이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이름의 부여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즉, 새로운 캐릭터를 인정하는 것과 같다.

"이름을 주는 것은 소유, 책임, 보호를 표시하는 권한의 행위이다." (Myers, 747).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너는 내 것이라"(1d절)를 의미하는 일종의 입양식이다. 즉, 여호와가 부모이고 이스라엘이 자녀가 되는 신성한 입양식.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 내가 너화 함께 할 것이고, 강을 건널 때 물이 너를 덮치지 못할 것이다. 불 속을 걸어도, 너는 타지 않을 것이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도 못할 것이다”(2절). 여호와는 그 백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에 속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호에 의지할 수 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이 가는 길이 쉽거나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위험에 노출될 때 이스라엘이 놀라거나 지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칼뱅은 "주님은 여러분이 즐거움과 사치를 즐길 수 있도록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모든 종류의 악을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마 6:13)라고 가르치신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 (2a절). 출애굽기에 대한 또 하나의 암시이다. 이스라엘을 추격하던 이집트군을 피해 달아나기 위해  그들이 홍해 바다를 무방비 상태로 통과하는 중에, 추격하던 이집트 군대가 물에 휩쓸려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이 제거되었다 (출 14-15장).

일부 학자들은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를 이스라엘이 마침내 요르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갔던 출애굽기의 끝을 암시하는 것 (수 3장)으로 생각한다. 그 횡단은 홍해를 건너는 것에 비하면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보려고 첩자들을 보냈을 때에, 첩자들이 이런 보고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 13:27,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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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Don’t be afraid; for I am with you. I will bring your offspring from the east, and gather you from the west.
6.  I will tell the north, ‘Give them up!’ and tell the south, ‘Don’t hold them back! Bring my sons from far, and my daughters from the ends of the earth—
7.  everyone who is called by my name, and whom I have created for my glory, whom I have formed, yes, whom I have made.’”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5.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음이라. 내가 동쪽에서 너의 자손을 데려오고, 서쪽에서 너희를 모으겠다. 6. 내가 북쪽에게 '그들을 포기하라!' 말할 것이고, 남쪽에게 '그들을 가두어 두지 마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데려오고, 내 딸들을 땅 끝에서 데려오라' 말할 것이다. 7. 나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 영광을 위해 내가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었고 내가 만든 사람들을 모두 데려오라' 하고 말할 것이다."

- 아 래(인용 및 편집: sermonwriter 그리고 개인 멘트 포함) -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음이라” (5a절). 우리는 앞 부분에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음이라" (43:1)를 읽었다. 여기에도 동일한 '두려워하지 마라'를 쓰여 있지만, '내가 너와 함께 있음이라'라는 다른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두 가지 이유는 겉으로는 다르지만 속은 동일하다. 이 망명자들은 여호와가 그들의 가장 큰 필요를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두려울 필요가 없다. 바울은 같은 생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롬 8:31). 그것은 우리의 방법이 쉽거나 원수들의 방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부르시며, 우리는 사탄이 우리를 속이고 유혹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위험을 고려한다면,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한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을 것이다. 바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이다. 다윗은 노래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내가 동쪽에서 너의 자손을 데려오고, 서쪽에서 너희를 모으겠다. 내가 북쪽에게 '그들을 포기하라!' 말할 것이고, 남쪽에게 '그들을 가두어 두지 마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데려오고, 내 딸들을 땅 끝에서 데려오라' 말할 것이다” (5b-6절). 이 구절은 하나님이 그에게 속한 자들을 찾기 위해 온 지구를 샅샅이 뒤질 능력이 있음을 약속한다. 그는 흩어진 사람들을 어디에 있던지 상관없이 함께 모을 의지가 있다. 이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이 모두 사실일 수 있다(Oswalt, 141):

  • 이것은 현재에 대한 약속이 될 수 있다. 망명자들은 바빌로니아에 모여 있으며,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자유를 얻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 흩어진 자녀들을 모을 능력이 있는 하나님은 이미 한자리에 모인 망명자들을 쉽게 데려올 수 있다. 이 구절들은 유대인들이 어디엔가에 있고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서 데려올 것이라는 것을 암시할 수 있다.
  • 이는 미래에 대한 약속이 될 수 있다. 미래에 유대인들은 상당한 분산을 겪게 될 것이고 이것은 또한 하나님이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약속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사실, 부분적으로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때부터 일어났다.
  • 이것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약속일 수 있다.

나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 영광을 위해 내가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었고 내가 만든 사람들을 모두 데려오라' 하고 말할 것이다" (7절). 앞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였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라' (1절) 이제 그는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를 이야기하면서, 그가 그들에게 준 이름이 주님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 그리고 사실 그렇다 -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목적을 배운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위대한 업적으로 드러난다: "여호와의 영광은 성막을 충만하게 하고...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출 40:34-35). 이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선언하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대답하셨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 33:18-20).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시 19:1).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도 그 영광을 보일 것으로 기대된다.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말하였다.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수 7:19). 다윗은 "그의 영광을 모든 민족 중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 명령했다 (대상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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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Bring out the blind people who have eyes, and the deaf who have ears.
9.  Let all the nations be gathered together, and let the peoples be assembled. Who among them can declare this, and show us former things? Let them bring their witnesses, that they may be justified; or let them hear, and say, “That is true.”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증인

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9.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는데 그들 중에 누가 이 일을 알려 주며 이전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 주겠느냐 그들이 그들의 증인을 세워서 자기들의 옳음을 나타내고 듣는 자들이 옳다고 말하게 하여 보라

"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데려오라. 9. 모든 민족들이 함께 모이고, 민족들이 집회를 열도록 하라. 그들 중에 누가 이 일을 선포하고 이전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그들이 자신의 증인을 세워, 그들이 옳은 것을 증명하도록 하여라. 사람들이 듣고 '그 말이 옳다'라고 말하게 하여라."

- 아 래(인용 및 편집: sermonwriter 그리고 개인 멘트 포함) -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데려오라" (8절). 앞에서 하나님은 맹인과 귀머거리 종들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와 길에 스스로 자신의 눈과 귀를 닫은 사람들이었다 (사 42:19). 이제 하나님은 '맹인과 귀머거리인 그의 종들을 데려오라고, 모든 민족들이 함께 모이고 민족들이 집회를 열도록 하라' (8-9a절) 지시하신다.

그들 중에 누가 이 일을 선포하고 이전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그들이 자신의 증인을 세워..., 그들이 옳은 것을 증명하도록 하여라. 사람들이 듣고 '그 말이 옳다'라고 말하게 하여라" (9b절). 하나님은 그의 백성(맹인과 귀머거리)을 증인으로 초대한다. 즉, 하나님이 틀렸음을 증명하거나, 백성이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백성을 초대한다. 마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희는 다른 신들을 숭배하고 영광을 주는 것을 선택했다. 지금 내 앞으로 와서 저 자신을 정당화해 보아라. 목격자들도 많이 데려오라".

여기에 감정적 호소가 있다. 맹인들이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고, 귀머거리들이 자신이 들은 것을 증언하는 것을 상상하라!" (Motyer)

위의 성경학자의 말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육적인 눈과 귀는 열려있지만 눈으로 보이는 것을 볼 수 없고 귀로 들리는 것을 들을 수 없는 영적인 맹인들, 그리고 귀머거리들... 우리의 신앙적인 눈과 귀는 어떨까요? 오늘도 못 보고 못 듣는 하루를 살아야 할까요? 못 보고 못 들으면, 당연히 말도 못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주의 종'으로 세우셨는데 만일 우리가 눈과 귀가 있어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면 증인으로서의 임무인 '증언'을 '입'으로 해야 하는데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허락해 달라고 우리는 간구해야 합니다. 종은 주인과의 관계에서 위치와 임무를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행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고1 딸이 어느날 말합니다. "엄마, 우리는 말미잘처럼 살아야 돼. 물 흐르는 방향으로 몸을 맡기는 말미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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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You are my witnesses,” says Yahweh, “With my servant whom I have chosen; that you may know and believe me, and understand that I am he. Before me there was no God formed, neither will there be after me.
11.  I myself am Yahweh; and besides me there is no savior.
12.  I have declared, I have saved, and I have shown; and there was no strange god among you. Therefore you are my witnesses”, says Yahweh, “and I am God.
13.  Yes, since the day was I am he; and there is no one who can deliver out of my hand. I will work, and who can hinder it?”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12.  내가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이니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10. "여호와가 말한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며, 나의 종으로 나의 택함을 입었으니, 이로 너희가 나를 알고 믿게 하려는 것이고, 내가 그인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나 이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고, 나의 후에도 없을 것이다. 11. 내가 바로 여호와다.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이라. 12. 내가 선포하였고, 내가 구원하였고, 내가 보여주었다.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으니,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내가 하나님이다. 13. 그렇다. 태초부터 내가 그이니, 내 손에서 구원할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할 것이니, 누가 이를 방해할 수 있겠느냐?"

- 아 래(인용 및 편집: enduringword 그리고 개인 멘트 포함) -

"여호와가 말한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며" (10a절).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의 위대함을 목격했었다. 만일 이스라엘이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한다면, 그들은 그의 놀라운 업적 하나하나를 '그가 유일한 참 하나님'이라는 진리의 증인으로서 볼 것이다.

우상 숭배자들은 증인으로서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위대함과 권위의 증인이다. 그들은 그것을 보고 경험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사 43:10)

"나의 종으로 나의 택함을 입었으니, 이로 너희가 나를 알고 믿게 하려는 것이고" (10b절). 증인은 누군가가 한 일을 수동적으로 관찰하는 사람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위대한 업적을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수동적인 관찰자 이상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의 종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들은 선택받은 것이다. 그들이 선택받은 이유는 모여서 둘러앉아 자신의 택함을 영광스럽게 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를 섬기고 주님을 알고, 또 모든 면에서 그분을 믿기 위함이다.

"나 이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고, 나의 후에도 없을 것이다" (10c절).  분명하고 확실한 말씀으로, 하나님은 자신이 가장 높은 신일뿐만 아니라, 자신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작은 신들'은 없고, '이등급 신들'도 없다. 하나님 이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고, 하나님 후에도 지음을 받을 신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신이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택하는 성경 구절들은 어떨까?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시편 82장 6-7절을 인용하면서 말씀하신다: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요 10:34-36). 그러나 시편 82편에서 신들(gods)을 사용하는 것은 은유였다.

바울은 사탄을 이 시대의 신이라고 불렀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the god of this age)'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 4:4). 그가 사탄이 주 하나님과 경쟁하는 진정한 신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탄을 신으로 여기기 때문에 사탄은 이 시대의 신이라고 불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전서 8장 4절에서 5절 사이에 민족이 숭배하는 우상들은 단지 신들일뿐이며, 신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분명히 했다.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고전 8: 4-6)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일부 증인은 예수가 진정한 신이지만 "하위 수준 신"이라는 의견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한 점이다. 그들은 그가 강력한 신이라는 것 (사 9:6)을 인정하나 전능하신 하나님임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실 때에, '나 이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고, 나의 후에도 없을 것이다' (43:10)하셨는데, 이는 진정한 하나님이 오직 한 분뿐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시편 82편과 같은 비유적이거나 은유적인 신들이 있다. 악마나 국가의 우상 같은 거짓 신들이 있다. 하지만 오직 한 분인 주 여호와를 제외하고는 진정한 신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여호와 증인들은 바로 이 구절에서 예수에 대한 교리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 

"내가 바로 여호와다.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이라" (11절). 주 하나님은 유일한 구세주이다. 오직 그만이 선언하고 구원을 하셨다. 여러분 중 선한 일을 한 이방 신은 없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자 후원이다. 슬프게도, 우리는 종종 첫 번째 자원이 아닌 최후의 수단으로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에게 눈을 돌린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주님 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으므로 예수님은 주님이 되셔야 한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 (12b절). 이스라엘이 오직 주만이 그들을 구원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들은 다른 신들에게 빨리 돌아가서 주님으로부터 돌아서지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구원, 구조, 치유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 태초부터 내가 그이니, 내 손에서 구원할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할 것이니, 누가 이를 방해할 수 있겠느냐?" (13a절). 신의 하나님은 시간 이전에 존재하셨다. 태초부터 계셨다. 그래서 그의 힘은 그 누구보다도 무한히 위대하다. 하나님은 당연히 '내 손에서 구원할 자가 아무도 없다'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할 때, 아무도 그것을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밀린 일들도 태산이고 날씨도 너무 덥고 밀린 QT를 빨리 끝내고 싶은데 개역개정 한글 뿌리고 WEB영문 버전 뿌리고 제가 번역하고 막상 글을 정리하려 하면 쓸 말이 별로 없습니다. 주제가 하나님에 대한 내용이라 더 어렵고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두 사이트의 영어성경 학자들의 글을 읽고 번역하고 편집하고 주석을 달아서 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우리에게 오셨지만 하나님은 육이 없고 영만 계시는 분이라 너무나 막연하고 무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하나님 이전에도 하나님 이후에도 그 아무도 없으신 분 'I AM WHO I AM'이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내 종이라'.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껴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꺾이고 갈대이고 꺼지는 등불입니다. 오로지 우리가 붙들 존재는 하나님,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이미 주님은 우리를 종으로 택하시고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 펼친 주인의 팔을 붙들고만 있으면 되는 우리는 종의 신분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이처럼 따뜻한 말이 또 있을까요? 우리 인간은 늘 불안합니다, 두렵습니다. 학교 문제로 자주 무서움으로 떠는 고1 딸 아이를 보면서 '뭐가 그리 무섭니?' 늘 묻곤 하는데 공포로 두려워 떨고 있는 저의 자화상을 저희 딸을 통해 봅니다.

세상은 두렵습니다, 공포스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결정에 '네'하고 대답하고 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무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무엇인가 결정하고, 행동으로 보여야 하기 때문에 오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닐까요? '종'으로서의 삶에 위로를 받고 위안으로 여기고 평화 속에서 산다면 두려움은 옆집 이야기가 아닐까요? 두려움이 없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BIBLIOGRAPHY: 
https://sermonwriter.com/biblical-commentary-old/isaiah-431-7-commentary/
https://enduringword.com/bible-commentary/isaiah-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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