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옥중서신 중 가장 짧은 빌레몬서를 끝내고 같은 저자의 골로새서로 들어갑니다. 로마 옥중에서 골로새인들에게 보낸 편지로 알려진 이 책은 우주 만물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라는 우주론적 차원에서의 기독교를 말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래의 동영상은 바이블 프로젝트에서 올린 것입니다. 한글 및 영문 자막은 영문 동영상에서 추출하였습니다.
Paul's letter to the Colossians. It was written during one of Paul the apostle's many imprisonments for announcing Jesus as the risen Lord. The letter is addressed to a group of people that Paul had never met
who made up a church community that he did not start. This church in Colossae was started by a co-worker of Paul's named Epaphras who was actually from that city.
골로새에 보낸 바울의 편지
골로새서는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부활하신 주로 선포하면서 감옥에 갇힌 기간 동안 쓰여진 편지중 한 통입니다. (골4:18)
이 편지는 바울이 한번도 만난 적 없으며 그가 개척하지 않은 교회 공동체로 구성된 그룹의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골로새에 있는 교회는 실제로 그 도시로부터 온' 에바브라'는 이름을 가진 바울의 동역자에 의해 개척되었습니다. (골 1:7-8, 4:12-13)
Epaphras had recently visited Paul in prison and he updated him on how well the Colossians were doing overall.
But he also mentioned some of the cultural pressures tempting them to turn away from Jesus. So Paul wrote this letter to encourage the Colossians to address the issues that Epaphras had raised and then to challenge them to a greater devotion to Jesus.
에바브라는 얼마 전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방문했었고, 골로새인들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잘하고 있는지 바울에게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에바브라는 또한 골로새인들을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돌아서도록 유혹하는 어떤 문화적 압력들을 언급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바브라가 제기한 그 이슈들을 다루고 골로새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으며,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께 더 큰 헌신을 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The letter's design and flow of thought are pretty easy to follow. The opening movement focuses on Jesus as the exalted Messiah. Paul then goes on to show how his suffering in prison is for the exalted Jesus. Then he addresses the pressures tempting the Colossians to turn away from Jesus. After this, he explores the new way of life that Jesus's resurrection opened up for them.
이 편지의 구성과 생각의 흐름은 꽤 따라가기 쉬운 구조입니다. 도입부는 존귀하신 메시아 예수님에 초점을 둡니다. 그 뒤 바울은 계속해서 그가 감옥에서 받은 고난이 어떻게 해서 존귀한 예수님을 위한 것이 되는지 보여줍니다. 그후 그는 골로새인들을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유혹하는 압력들에 대해 다룹니다. 이후에 그는 예수님의 부활로 그들의 삶에 열린 새로운 길을 탐구합니다.
The letter opens with two prayers. Paul first thanks God that he learned from Epaphras that the Colossians have been totally faithful to Jesus, showing love for God and their neighbors all because of the hope they have in the new creation that Jesus has in store.
그 편지는 두 개의 기도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먼저 그가 에바브라를 통해 골로새인들이 온전히 예수님께 신실한 것을 알게 되었고, 골로새인들이 예수님이 알려주신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 소망하는 마음을 품게 됐고, 그 결과 하나님과 그들의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이 그들에게서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골1:3-5)
He moves on to pray that they would grow in their wisdom and understanding about Jesus. Then Paul has placed a poem here to help the Colossians and us do exactly that. It is the centerpiece of chapter 1, a poem all about the crucified and exalted Messiah.
그리고 그는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지혜와 이해가 자라나기를 기도합니다. (골1:9-10) 그리고 바울은 골로새인들과 우리들이 그렇게 바르게 자라나도록 돕기 위해서 하나의 시를 배치합니다. 이 시는 골로새서 1장의 중심 부분인데, 시 전체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존귀하신 메시아에 관한 것입니다.
It has two parallel stanzas. It is crammed with language and imagery from the books of Genesis and Exodus, from the Psalms and the Proverbs. The first stanza explores how Jesus is the true image of God. In him the full character and purpose of God is embodied in a human. He is the firstborn, an Old Testament phrase about Jesus' royal status over all creation. He shares in the very identity of the one true creator God. By him, all reality, all powers and authorities, spiritual and human, have been created. It is in Jesus the Messiah that we discover the very author and king of creation.
이 시는 두개의 병렬되는 절이 있습니다. 이 시는 창세기와 출애굽기, 그리고 시편과 잠언으로부터 나온 언어와 이미지로 가득차 있습니다. (창1, 출40, 시2,8,68, 잠8) 첫 절은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참된 형상인지를 탐구합니다. 그 안에 가득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목적은 한 사람 안에서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나신 분이며 구약은 모든 피조물들 위에 높으신 예수님의 왕적 지위에 관해 말합니다. 그분은 한 분이신 참된 창조자 하나님의 바로 그 정체성을 공유하고 모든 실재, 모든 능력과 권세, 영적 존재와 인간이 예수님으로 인해 창조되었습니다. 우리가 발견하는 창조의 왕이자 창조자는 바로 메시아 예수 안에 있습니다.
In the second stanza we discover he is also the one bringing about a new creation. He is the head of a new body, which refers to Jesus' people, who were the new humanity, of which his own resurrection existence is a prototype.
In him, God's glorious temple presence dwells. So, it is through Jesus's death and resurrection that God has reconciled himself to humanity, to all spiritual powers, to all of creation. It is a remarkable poem and Paul will keep referring back to it as he goes on in the letter.
두번째 절에서 우리는 그가 또한 새로운 창조를 가져오는 분인 것을 알게됩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새로운 몸 중 머리에 해당하십니다. 그는 새로운 몸의 머리입니다. 여기서 몸은 새 사람이 된 예수님의 사람들을 말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존재가 바로 새 사람의 원형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전이 그분(예수)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들, 모든 영적 권세들, 모든 인류와 화목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놀라운 시이며 바울은 이 편지에서 이 시를 계속 언급할 것입니다.
He first shows how the truth of this poem transforms his own experience of suffering in prison. He is being punished for announcing to the Greek and the Roman world that Jesus is the resurrected Lord and king of all. So his suffering, he thinks, is not a sign of defeat. It is actually his way of participating in Jesus's own suffering, done as an act of love.
그는 먼저 이 시에 기록된 진리가 바울 자신이 감옥에서 겪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이며 모든 사람들의 왕이심을 그리스-로마 세계에 선포했기 때문에 형벌을 받고있었습니다. 바울이 생각할 때, 그의 고난은 패배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고난을 받은 이유는 실제로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행한 행동 때문이었고, 또한 그 고난은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하는 바울의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So his hardships are actually a cause for joy. He is imprisoned for the surprising news that Israel's resurrected Messiah is creating a new multi-ethnic family. And more: just as the divine glory dwelt in Jesus, so Jesus dwells in and among his international family. Or, as Paul says, the Messiah is in you all, the hope of glory.
그래서 바울의 역경은 실제로는 기쁨의 근원이 됐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부활하신 메시야가 새로운 다민족 가족을 만들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했기 때문에 투옥되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 안에 주의 영광이 거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그의 국제적인(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가족들 가운데 그리고 그 가족들 안에 거하십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모두 안에 메시아가 계시는데, 그분이 곧 영광의 소망이라고 말입니다.
Paul then addresses the cultural pressures that are tempting the Colossians to turn away from Jesus. They were confronted by a combination of mystical polytheism along with a pressure to observe the laws of the Torah. So, all these new Christians had grown up worshipping the various Greek and Roman gods, who govern different arenas of human life. Many simply included Jesus as one more deity that they could worship.
바울은 골로새인들을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유혹하는 문화적 압력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에 기록된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압력과 신비주의적인 다신교 종교와 맞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새신자들(=골로새인들)은 인생의 여러 무대를 다스리는(다스린다고 믿었던) 각각의 다양한 그리스-로마 신들을 숭배하며 자라왔습니다. 그 새신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단지 자신들이 경배하는 많은 신들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There was also a great pressure from the Jewish Christian community for these non-Jews to complete their commitment to the Messiah by following all of the laws found in the Torah. Specifically, he mentions eating a kosher diet, observing sacred days and circumcision. It is very similar to the problem he addressed in the letter to the Galatians. For Paul, to give in to either of these temptations is compromised. It is a failure to grasp who Jesus really is and what he did on their behalf.
또한 그리스도인 중에서 유대인으로 구성된 공동체에서는 이런 비유대인들(=골로새인들)에게 모세오경에 나오는 모든 율법을 지켜서, 메시아께 대한 헌신을 완성하라고 크게 압박했습니다. 바울은 특히 거룩한 날(안식일)과 할례를 지키는 것과 정결한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다룬 문제와 매우 비슷합니다. 바울은 이런 유혹들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허용하는 것은 타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것을 허용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진짜로 누구이신지와,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인지 골로새인들이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는 의미였습니다.
The Colossians used to live in fear of spiritual powers and elemental spirits, as Paul calls them, but Jesus triumphed over these through his death and resurrection. He freed the Colossians from any obligation to them. In the same way, Jesus fulfilled on our behalf all of the laws of the Torah, which never had the power to transform the selfish human heart anyway. So, what Jesus did in his life and death and resurrection lacks nothing. It doesn't need to be supplemented by following the laws. He is the reality to which all of the laws of the Torah were pointing anyway.
Instead of the laws, followers of Jesus have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to change them, which is what he goes on to explore.
골로새인들은 영적인 신들과 정령들을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울이 골로새서 2장 15절에서 말한 것처럼, 이런 영적인 신들이나 정령들을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골로새인들을 그들의 종교적 의무로부터 자유롭게 만드셨습니다. 동일한 방식(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으로,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마음을 결코 변화시킬 능력이 없었던 모세오경의 율법을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완성시키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 가운데 행하신 일은 완벽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그 일은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보충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오경에 기록된 모든 율법이 가리키는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율법 대신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자신들을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갖게됩니다.
Following Jesus means joining his new humanity because their lives have now been joined to the risen Jesus' life.
This is why Paul challenges the Colossians to set their minds on things above, where the Messiah is seated, or rules, at God's right hand. Now Paul does not mean here, think about how you will one day leave Earth and go to heaven. Rather, the heavens are the transcendent place from which Jesus rules now over all of creation. From there, he will one day return here to transform all things, or, as Paul says, when the Messiah who is your life is revealed, you too will be revealed with him in glory.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새로운 공동체에 합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은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삶과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골로새인들이 메시아가 앉아계신 곳이자, 하나님 오른쪽 편이자, 통치하시는 곳인 그곳에, 골로새인들의 마음을 두도록 요구하는 바울의 방식입니다. (골 3:1) 지금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어느 날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그 초월적인 장소를 바로 천국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거기(천국)에서, 모든 만물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여기(이 세상)로 돌아오실 것입니다. 아니면, 바울이 말한 것처럼, 여러분의 생명되신 메시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 또한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골3:4)
So, Paul challenges them to live in the present as the kinds of new humans they will one day become. He uses the image of their old humanity characterized by distorted sexuality and destructive speech. For Christians, that humanity died with Jesus and has been replaced by his own new humanity, which is characterized by mercy and generosity, by forgiveness and love. This humanity transcends the ethnic and social boundary lines of our world to create, in Paul's words, a people where there is no one Greek or Jewish, circumcised or uncircumcised, slave or free,
but the Messiah is all and is in all people.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인들에게 어느 날 변하게 될 그 새로운 종류의 사람들처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라고 요구합니다. 바울은 왜곡된 성생활과 파괴적인 언행을 해왔던 골로새인들의 옛 사람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골로새인들의 그러한 옛 사람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 되고, 자비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과 같은 예수님의 성품을 소유한 새 사람의 모습으로 대체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그리스인이거나 유대인이나, 할례를 받았거나 받지 않았거나, 노예이거나 자유인이거나 상관없는 새 사람을 창조하기 위해서, 이런 새 사람은 우리 세계의 인종적, 사회적 경계선을 초월합니다. 하지만 메시아는 이런 모든 사람들 속에 계시며, 메시아가 그들의 전부가 됩니다. (골3:11)
Paul then gets really practical. He shows the Colossians what this new humanity might look like in a first century Roman household, which was a highly authoritarian institution where the male patriarch held the power of life and death over his wife, children and slaves.
그리고 나서 바울은 정말 실질적인 예를 제시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인들에게 1세기 로마 가정에서 이 새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는지 알려주는데, 당시 1세기 로마 가정은 남성인 가장이 그의 아내와 아이들과 노예들의 생명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었던 매우 권위적인 관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Not so in a Christian household. Here the risen Jesus is the true Lord. So in the Lord, the wife allows her husband to become responsible for her. And the husband is subject to Jesus by loving his wife and placing her well-being above his own. In a home where Jesus is Lord, children are not objects but are called to maturity and to respect. Parents are to raise their children with patience and understanding.
그리스도인 가정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참된 주인입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아내는 자신의 남편이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합니다. 그리고 남편은 자신보다 아내의 행복을 우선으로 두며 그의 아내를 사랑함으로써 예수님께 복종합니다. 예수님이 주인인 집에서, 아이들은 사물이 아니고 성숙과 존경을 받습니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를 인내와 이해로 양육해야 합니다.
Christians who are slaves are to honor their human masters precisely because they are not the real master. Jesus is.
And Christians who have slaves are to understand that this slave is not their property, But rather, a fellow member of Jesus's body to be honored and embraced in love.
노예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주인인 인간을 반드시 존경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진정한 주인은 그 인간이 아닌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예를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노예들이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한 몸인 형제로 존중하고 사랑으로 품어야 합니다.
Paul is walking a very fine line here. He is reshaping the most basic Roman institution around Jesus, who rules by his self-giving love. So while he does not abolish the household structure outright, the exalted Messiah demands that it be transformed almost beyond the point of recognition for any Roman living in Colossae.
바울은 여기에서 매우 멋진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내어주신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예수님 중심으로 가장 기본적인 로마의 관습을 재편하고 있습니다. 존귀하신 메시아는 골로새에 있는 로마인들이 그들의 가정 구조를 완전히 폐지하지는 않으면서도, 삶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뛰어넘어 변화되길 요구합니다.
You can see this most clearly in the letter's conclusion. After a request for prayer, Paul applies these instructions about Christian slaves and masters. We discover that Tikecus is the one carrying and reading this letter to the Colossians. He is accompanied by a certain Onesimus who was a former slave to a Colossian Christian named Philemon. We discover from another letter addressed to Philemon that Onesimus had escaped from his master.
It was a crime worthy of imprisonment. But Paul asks the whole church to greet Onesimus as a faithful and beloved brother in the Lord.
편지의 결론에서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골4:2-18) 기도 요청 이후에 바울은 이 가르침을 그리스도인 노예들과 주인들에게 적용합니다. 우리는 두기고가 이 편지를 골로새인들에게 전해주고 읽어주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기고는 골로새 출신 그리스도인인 빌레몬의 노예로 있었던 오네시모와 동행했습니다. 우리는 빌레몬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빌레몬서)에서 오네시모가 그의 주인인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감옥에 갈 만한 범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교회들에게 오네시모를 주 안에서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로 맞아주길 요청합니다. (골4:9)
In the letter to Philemon, Paul says that he should receive Onesimus no longer as a slave, but as a brother. Talk about ending the letter with a punch!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빌레몬서)에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형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골4:16) 한 방 얻어맞은 듯한 이 편지(골로새서)의 마무리에 대해 한 번 대화를 나눠보시기 바랍니다
So, in the letter to the Colossians, Paul is inviting us to see that no part of human existence remains untouched by the loving and liberating rule of the risen Jesus. Our suffering, our temptation to compromise, our moral character, the power dynamics in our homes, all of it must be re-examined and transformed. We are invited to live in the present as if the new creation really arrived when Jesus rose from the dead. And that is what the letter to the Colossians is all about.
어떤 부류의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사랑하심과 자유케 하심으로 통치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바울은 우리를 골로새에 보내는 편지(골로새서)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 우리의 타협하고자 하는 유혹, 우리의 도덕성, 우리 가정에서의 힘의 역동성 - 이 모든 것들은 재검사되고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마치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 새로운 피조물(새 사람)이 실제로 도래한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을 그렇게 살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이것이 골로새서가 말하는 전체 내용입니다.
"우리의 삶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자유롭게 하는 통치가
관여하지 않는 영역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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