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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성경묵상

요한복음(John)5:1-15(치유와 안식일 논란)

by 미류맘 2022.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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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십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고 유대인들은 치유받은 사람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여 안식일 율법을 위반한 사람의 정체를 묻습니다. 

 

1. After these things, there was a feast of the Jews, and Jesus went up to Jerusalem.
2. Now in Jerusalem by the sheep gate, there is a pool, which is called in Hebrew, “Bethesda”, having five porches.
3. In these lay a great multitude of those who were sick, blind, lame, or paralyzed, waiting for the moving of the water;
4. for an angel went down at certain times into the pool, and stirred up the water. Whoever stepped in first after the stirring of the water was healed of whatever disease he had. 

오래된 병을 고치시다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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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마 뒤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는데, 다섯 개의 기둥이 있었다. 3. 그 안에는 아픈 사람, 앞 못 보는 사람, 다리 저는 사람, 마비된 사람들이 누워서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다.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였는데, 물이 움직인 후에 제일 먼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나았던 것이다. 

죽어가던 고관의 아들을 살리는 두 번째 이적을 행하신 후,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님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세 번째 이적은 베데스다 연못에서 일어납니다. 이 곳에는 그늘이 있어서 많은 장애인들이 모여 매우 혼잡했을 것입니다. 절박한 많은 사람들, 거의 40년 불구로 살아온 치유를 앞둔 사람. 기적적인 치유가 어떤 바람을 일으킬까요?

베데스다 연못은 일전에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 방문했을 때 들렸는데 (물이 없는) 연못의 깊이가 상당히 깊었습니다. 성전 근처에 있고 5개의 행각이 사진에 찍힌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연못은 주기적으로 물이 그쳤다 이어졌다 하는 간헐천(間歇泉)이었습니다.

그 때 쓴 글입니다(아래). 베데스다의 어원은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에서 있는데 Bethsaida는 "house of mercy(자비의 집)" 또는 "house of grace(은혜의 집)"이란 뜻입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이 단어는 "shame, disgrace(창피함, 불명예)"란 뜻고 있다는데... (이 뜻은 어디서 찾았는지 모르겠네요. 이 이적의 끝이 정말로 '창피함'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48. 사자의문 통과해서 베데스다의 기적, 그리고 골고다언덕으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2017년 2월 16일(목) 3: 사자문(Lion's Gate), 마리아교회의 베데스다의 기적, 그리고 골고다

4miryu.tistory.com


성전 바로 근처에 이렇게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몰려들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열악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한 면입니다. 성전에서 장사하고 환전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고, 이번에 예수님은 성전 근처에서 소외된 장애인들을 향합니다. 연못 사진을 다시 찾아 보니 당시 각종 장애를 가진 고통받는 사람들이 은혜와 자비를 찾아 괴로움으로 호소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5장 4절의 천사의 이야기에 대한 내용이 현대 번역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한글성경에서 현대 번역본에는 4절 구절이 (없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용이 신비해서 눈이 갈 수밖에 없는데 이 구절은 성경 원고에서 발견되는 극단적인 '변종(variants)'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베데스다 연못처럼 놀랍도록 보존되어 있는 걸작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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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A certain man was there, who had been sick for thirty-eight years.
6. When Jesus saw him lying there, and knew that he had been sick for a long time, he asked him, “Do you want to be made well?”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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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거기에 38년 앓아온 한 남자가 있었다. 6. 예수께서 그가 거기에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오래된 것을 아시고 물으셨다. “낫기를 원하느냐?"

저는 이 구절을 읽고 좀 묘한 느낌을 받았는데 한 외국 성경학자의 같은 생각을 정리합니다(아래): 

예수님이 하시는 질문이 흥미로운데, 불구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 단어들은 다른 말투로 들린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낫게 해 줄까?'라고 확답을 구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그는 그 남자의 무감각과 무관심에 도전하는 것인지: '낫기를 원하기는 하냐?' 흥미롭게도 7절에 나오는 남자의 대답은 '그렇다'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안식일에 자기 자리를 들고 가는 일에서도 그렇게 할 것이다(요 5:11). 이것은 그 남자가 단순히 희망을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낫아지는 것에 특별히 관심이 없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은 때때로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거부하는 습관이 있다.

자신의 불행에 무감각해 질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마법의 돌을 발견한 세 사람'이라는 외국의 농담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사람이 그것을 집으면 그의 귀머거리가 낫고, 두 번째 사람이 집으면 아펐던 등이 낫는데, 세 번째 사람은 도망치면서 "저리 떨어져요, 전 장애인이에요!"라고 외칩니다. 40년 앓았던 사람이 바로 이런 정신 상태였는지 아닌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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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The sick man answered him, “Sir, I have no one to put me into the pool when the water is stirred up, but while I’m coming, another steps down before me.”
8. Jesus said to him, “Arise, take up your mat, and walk.”
9. Immediately, the man was made well, and took up his mat and walked. Now it was the Sabbath on that day.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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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병든 사람이 대답했다. "선생님, 물이 움직일 때 저를 못 안으로 넣어줄 사람이 없어, 제가 들어가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거라" 하시니 9. 그 즉시 그 사람이 병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앞에서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 가운데 38년 동안 앓아온 사람에게 접근하셔서 '낫기를 원하느냐?' 질문하셨습니다. 아픈 사람은 '그렇습니다' 대답 대신 '자신을 못 안으로 넣어줄 사람이 없음'을 하소연합니다. 문맥으로 보아 그는 혼자 들어가려고 했을 수도 있고, 그냥 앉아서 다른 사람들의 자비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죽어가는 아들을 위한 기적을 구했던 고관의 경우, 그는 예수님께 집요하게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요청을 들어주셨지만 그 고관은 아들이 낫았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현장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스스로 증명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38년 앓은 이 남자는 예수님의 질문에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고 '낫기를 원하느냐?' 질문에 '그렇다' 대답도 안합니다. 그저 주변만을 불평합니다.  

예수님의 일곱 개 이적 중 세 번째인 이 이적의 당사자는 치유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믿음에 대한 주제를 꺼낼 수도 없습니다. 그가 예수를 찾지도 않았고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손을 내밀어 행동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38년 (거의 평생을) 병으로 고생한 사람이 바로(즉시) 병이 나아서 자신의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은 일종의 일(그들의 눈에는 '일'로 간주됨)이었고 안식일에 모든 일은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성경학자는 이 상황을 설명합니다(아래): 

예수님은 우연히 이 요청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그가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굳은 마음을 자극하기 시작하는 그의 사역의 단계이다. 몇몇의 예수의 치유는 안식일에 행해지는데, 이는 냉혹한 종교 지도자들을 (의도적으로) 자극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눅 4:31-37, 14:1-6, 마태복음 12:9–14).

설명을 따라가면 예수님이 보이시는 이적들의 종류도 우연이 아니었고 안식일에 병 고침, 가르침 등을 행하신 것도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자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실 때는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로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사역에 예수님이 정하신 적시(適時)와 적소(適所)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하였고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왜 치유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희망조차 포기한 사람이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불구자를 택하셔서 진정한 기적을 보이십니다. 예수님은 고의적으로 안식일을 택해서 (안식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전통을 위반하여, 거짓 종교 지도자들의 굳은 마음을 자극하기 위해) 그런 기적들을 보이셨을까요? 그 점은 아이러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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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So the Jews said to him who was cured, “It is the Sabbath. It is not lawful for you to carry the mat.”
11. He answered them, “He who made me well, the same said to me, ‘Take up your mat, and walk.’
12. Then they asked him, “Who is the man who said to you, ‘Take up your mat, and walk’?”
13. But he who was healed didn’t know who it was, for Jesus had withdrawn, a crowd being in the place.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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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래서 유대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말했다. "오늘은 안식일인데, 당신이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11. 그 사람이 말했다. "나를 고쳐주신 분이 나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거라'” 말씀하셨습니다. 12. 유대인들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거라' 말한 사람은 누구요?" 13. 그러나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 곳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께서는 이미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요한이 '유대인'이라 언급하는 용어는 당시 예루살렘의 종교적 지도력을 말합니다. 안식일의 규칙을 위반한 병이 나은 사람에게 '율법을 위반하였다!' 경고합니다. 병 고침 받은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는) 자신을 고쳐주신 분이 시키는 대로 했다 말합니다. 그는 '책임을 떠넘기는' 이상한 패턴을 계속합니다. 유대인들은 기적에 놀라지 않고, 오히려 안식일에 병을 고친 예수께 화가 납니다. 성경학자의 설명 인용합니다(아래): 

지역 종교 지도자들은 이 남자를 심문할 권리가 있었다 세례 요한(요한 1:19)에 대한 조사와 마찬가지로 진리를 지키는 것은 그들의 책임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구절들은 그들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들의 안식일 전통을 깨뜨린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공격은 예수님이 행한 기적을 우선한다. 특히 다음 구절(요 5:12)에는 '누가 너를 낫게 하였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누가 너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였느냐?'가 그들의 질문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이는 마치 그들이 '누가 너에게 우리의 전통을 위반하라고 말했느냐?'은 그들의 굳은 마음을 드러내는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초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힘이 아니라 전통을 사수하는 것에 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 고침이나 가르침을 전파하실 때에도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예수를 살핍니다. 예수가 고단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선행이나 이적을 베푸는가에는 추호의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어떻게 자신들의 전통을 깨는지 찾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다른 장면에서도 그러듯 그 곳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많은 무리 속으로 걸어들어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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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Afterward Jesus found him in the temple, and said to him, “Behold, you are made well. Sin no more, so that nothing worse happens to you.”
15. The man went away, and told the Jews that it was Jesus who had made him well.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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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말씀하셨다“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악한 일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5. 그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나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고쳐주신 분이 예수라 말하였다.

이 이적이 있은 직후 예수는 현장을 떠나셨고 예수님은 행하신 이적 자체에 대한 무리의 반응을 보는 것에 관심이 없어 보이십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은 치유된 사람을 찾으시고, 그에게 명령하십니다. 14절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의 이전 상태를 죄와 연결시키는 것 같습니다 - 즉, 그 사람의 장애는 죄를 행한 결과일 수 있다. 동시에 예수님은 인간에게 불구가 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 중에는 죄악의 영원한 형벌(눅 12:4-5)이 있습니다.

특정 사람의 불구와 죄악을 연결시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말씀으로 들립니다. 육체가 불구가 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마음의 죄악으로 인해 영원한 형벌(곧 사망)에 처할 수 있다는 경고성 말씀이 아닐지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주의하라' 경고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눅 12:5).

육신을 죽인 후에 너희를 지옥으로 던질 권세 있는 그분을 두려워하라
Fear him who, after the killing of the body, has power to throw you into hell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두 번 죽습니다. 물리적 육체의 사망과 죄악으로 인한 영적 사망.

성경은 (특히 복음서의 경우) 한 사건 이후 모든 후기를 볼 수 없습니다 (이 경우, 고침을 받은 사람이 예수께 감사를 표했는지 여부 등). 그런데 문맥으로 보면 그 사람이 정말로 치유에 관심이 있었을까요? 고침을 받은 후, 그는 오히려 (예수님을 향한) 불평과 (주변 사람들에게) 책임 전가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체적인 병을 영적인 병으로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영적인 병을 치유할 필요를 느끼고 있을까요? 어떤 경우 마음의 병을 치유를 하지 않는 편이 더 편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병과 대면하는 순간 불편해서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냥 죄에 습관이 되어 죄와 벗하여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8, 이미지 소스:https://www.vinebiblestudy.org/)

그는 자리를 떠났고, 자세한 이야기는 없지만 치유받은 사람은 자신의 병을 고쳐준 사람이 예수임을 알았고, 예수를 종교 지도자들(유대인)에게 고발합니다. 14절에서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걱정이 15절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는 고침을 받고 더 악한 일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5:14
)

 

BIBLIOGRAPHY
https://enduringword.com/bible-commentary/john-5/
https://www.bibleref.com/John/5/John-chapter-5.html
개역개정 아래의 볼드체 성경구절은 WEB영어성경에 기반한 저의 개인 번역입니다 (따라서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구절 위 코멘트 중 존칭어의 텍스트는 저의 개인 멘트이고, 반어체는 인용, 번역 및 수정문구입니다.
인용 중 재인용은 이텔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예: 성경, 외국 학자설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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