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전통을 깨고 하나님과 동등함을 주장했다고 지적하자, 예수님은 증언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십니다. 그것들은 인간인 요한의 증언, 예수님의 이적을 통한 증언, 그리고 성경의 증언입니다.
내용이 기독교론에 대한 것이 많아서 많은 부분 외국의 성경 전문 사이트에서 인용, 번역 및 편집해서 올립니다.
30. I can of myself do nothing. As I hear, I judge, and my judgment is righteous; because I don’t seek my own will, but the will of my Father who sent me.
예수를 믿게 하는 증언
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30. 나는 아무 것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하니 나의 심판은 의롭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의 뜻을 구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내 아버지의 뜻을 구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함을 주장하셨고, 여기서는 예수님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연결해서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을 정당화하고 계십니다.
------------
31. “If I testify about myself, my witness is not valid.
32. It is another who testifies about me. I know that the testimony which he testifies about me is true.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32.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
31.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않다. 32.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다른 분이 있으니, 나는 그가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증언이 옳다는 것을 안다.
31절 유대인의 법적 절차에 따르면, 사람은 그들 자신을 위해 혼자 증언할 수 없었다.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법정에서는 두세 명의 증인이 필요했다(신 17:6, 민 35:30). 이 구절은 성경 신앙에 대한 논의에서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은 '맹신(맹목적인 믿음)'에 호소하지 않으신다. 즉,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자신을 믿으라고 말하지 않으신다. 또한 증거의 필요성을 부인하지도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그의 메시지를 믿는 것이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예수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세 개의 다른 증거들를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정상적 증거 요건을 충족시킬 것이다.
이 세 가지 증거는 세례 요한을 통한 사람의 증언(요 5:33), 예수님의 이적을 통한 증언(요 5:36), 그리고 성경의 기록을 통한 증언(요 5:39)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주장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로 자신을 학대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답변을 완성하실 것이다(요 5:18).
32절 예수는 유대인들의 도전을 받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의 전통을 깨고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것(요 5:18)에 분노한다. 예수님은 맹목적인 믿음에 호소하기보다는 어떤 주장들은 증거로 뒷받침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신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우선 사람의 증언에 대한 증거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복음서의 앞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에게 사람을 보낸다(요 1:19–24). 자신의 소명에 충실한 그는 자신을 보지 말고 자신 뒤에 오시는 '약속된 이'를 보라고 지적하는데,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셨다(요 1:2-31).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이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그것을 진리로 보증할 것이다.
------------
33. You have sent to John, and he has testified to the truth.
34. But the testimony which I receive is not from man. However, I say these things that you may be saved.
35. He was the burning and shining lamp, and you were willing to rejoice for a while in his light.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35.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냈고, 요한은 진리를 증언하였다. 34. 그러나 내가 받는 증언은 사람의 증언이 아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35. 요한은 타오르면서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잠시 그의 빛 가운데서 기뻐하기를 원했으나,
33절 인간의 영혼과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은 그저 맹목적인 믿음에 호소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그는 증거에 대한 인간의 정상적인 요구를 거부하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좁은 관점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제공하는데, 그 첫 번째 증거는 예수님 전에 와서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세례 요한입니다.
34절 사람들이 믿는 안 믿든 진리는 진리입니다. 증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다. 이는 나는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지 내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요 8:14) 하나님의 아들로서 알 수 있는 것이 있고 그 주장의 진리는 인간의 승인에 달려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나는 메시아니) 그냥 믿으라!' 말하지 않고 세 개의 증언(증거)을 제시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인간의 잘못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35절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을 '빛'의 증인으로 언급합니다(요 1:7).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1:9), 즉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요한입니다. 한 성경학자 설명이 의미가 있습니다(아래):
여기서 예수는 세례자 요한을 '하나의' 빛으로 언급한다 - 마치 한 방향을 비추는 랜턴과 같은. 요한의 긍국적인 목적은 사람들을 예수 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었다(요한 1:8-9).
아치 극장 연극의 스포트라이트(성경시대의 등불)의 역할과 같이 요한의 사명은 주연이 무대에 올라왔으나 어두워(조명 또는 사람들의 영안이) 볼 수 없는 예수님을 비추는 하나의 빛으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어떤 멋진 연기를 할 지 기대에 부풀어서 조연인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 시선을 예수님 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그의 소명이었습니다. 다음 구절에서, 예수는 그의 메시지가 사실임을 증명하는 증거의 형태인 두 개의 증언을 더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행한 기적들(요 5:36)과 성경에 기록된 내용(요 5:39-40)에 대한 것입니다.
------------
36. But the testimony which I have is greater than that of John, for the works which the Father gave me to accomplish, the very works that I do, testify about me, that the Father has sent me.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
36. 나에게 있는 증언은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크니, 아버지께서 나에게 이루게 하라고 주셨고, 지금 내가 행하는 바로 그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두 번째 증언, 즉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예수님이 행한 이적들을 설명하십니다. 이러한 이적들은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직접 본 사건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이적들이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크다'고 언급하십니다. 실제로 요한은 이적을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학자의 설명입니다(아래):
이것이 사실 이 복음 전체의 주요 목적이다. 요한은 특히 예수의 이적 중 일곱 가지를 '표적(signs)'라고 부른다 (요한 2:11). 이 몇 가지 사건만을 선택하는 목적은 예수가 사실 하나님임(요 20:30~31)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이적은 하느님의 메시지를 증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간헐적으로 사용된다 (히 2:3-4).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시고 계신다는 것은 그분의 일을 보는 사람들(요 3:2) 안에 믿음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다.
------------
37. The Father himself, who sent me, has testified about me. You have neither heard his voice at any time, nor seen his form.
38. You don’t have his word living in you; because you don’t believe him whom he sent.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
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다. 너희는 그의 음성을 들은 적도 없고 그의 형상을 본 적도 없다. 38. 그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지 않은 것은 그가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도입부에서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요 1:18)는 생각을 언급하고 있다. 이 첫 구절은 그리스어로 "메시지, 의미, 정의"를 의미하는 '로고스(Logos)'를 사용하여 예수를 반복적으로 '말씀(the Word)'으로 언급한다. 진리가 진리이나 누가 진리를 받아들이든 예수님은 인간에게 합당한 증거가 필요함을 아신다(요 5:34). 예수님은 맹목적인 신앙에 호소하기보다는 유대 법질서가 요구한 것을 세 개의 증언으로 정확히 제공하신다.
앞에서 세례 요한의 증언과 더 강력한 증언인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언급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세 번째 증언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학자의 설명입니다(아래):
그러나, 이 증언은 예수님의 비판자들에게 효과가 없었다. 그리스도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율법의 말씀과 글자를 확실히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지식'은 '믿음'과 같지 않다. 예를 들어 야고보는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는 것과 같지 않다는 논지를 폈다(야 2:14, 19).
야고보는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 믿음이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야 2:14) 물었습니다. 앞은 '지식(knowledge)'이고 뒤는 '믿음(faith)'입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아는 것은 귀신도 안다(야 2:19)' 그리고 그는 질문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아느냐?'(야 2:20)
저도 말씀이 이해가 안되면 계속 파고듭니다. 그러나 말씀을 아는 것은 '지식'입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구원으로 가는 길임을 알고 있습니다. 유대 종교자들에게 이 세 번째 증거, 즉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의 기록이 가장 효과적인 증거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37절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으므로 유일하신 하나님이 보내신 살아계신 메시지(요 1:18)를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대한 지식은 있었지만 겸손이나 참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읽고, 듣고, 보았으나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리보다 자신의 전통, 권위와 위신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증거를 제공하였으나, 그들은 마음이 굳어져 믿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타협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
39. “You search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in them you have eternal life; and these are they which testify about me. 40. Yet you will not come to me, that you may have life.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
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성경을 연구하는데, 바로 그 성경이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40. 그러나 너희는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나에게 오지 않는다.
39절은 세 번째 증언, 즉 성경에 기록된 증언입니다. 예수님의 이 경고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직면한 핵심 문제입니다. 성경은(그리고 예수님은) 증거 없는 믿음인 '맹목적인 믿음'을 표현할 것을 누구에게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어떤 증거를 들어도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증거가 반드시 순종이나 신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만 안다고 순종이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야 2:19). 여기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성경에 정통했다고 해서 반드시 예수님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닙니다(요 7:17).
40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모든 이들에게 근본적인 문제인 종교적 위선자들의 불신 뒤에 있는 진짜 문제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믿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믿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증거를 제시해도 그것을 극복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의 말이 맞습니다. 야고보서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이 같지 않으며, 따라서 단순한 '지식'은 믿음을 구하는 것과 같지 않음을 분명히 합니다.
------------
41. I don’t receive glory from men.
42. But I know you, that you don’t have God’s love in yourselves.
43. I have come in my Father’s name, and you don’t receive me. If another comes in his own name, you will receive him.
44. How can you believe, who receive glory from one another, and you don’t seek the glory that comes from the only God?
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
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42. 너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음을 나는 안다.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나, 너희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기의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44. 너희는 서로 영광을 받으면서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으니,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
앞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오지 않으려 함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십니다. 사람들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앞에서도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하셨으나 사람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고 어떠한 증거도 그들의 굳은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믿어야 할 많은 증거들을 받았습니다. 하나, 그들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서 요한이 진리를 증언했습니다. 둘, 예수님의 이적들을 목격했습니다. 셋, 그들은 또한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마음)이 아니라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의지)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생각일 뿐인 전통을 크게 강조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훌륭한 지식을 자랑하고 서로 영광을 주고 받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해야 하는데 인간의 영광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믿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야 2:14)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하나님을 실제로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증거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
45. “Don’t think that I will accuse you to the Father. There is one who accuses you, even Moses, on whom you have set your hope.
46. For if you believed Moses, you would believe me; for he wrote about me.
47. But if you don’t believe his writings, how will you believe my words?”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 생각하지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사람은 바로 너희가 소망을 두고 있는 모세이다. 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다면, 나를 믿을 것이다. 그가 나에 대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47. 그러나 너희는 그의 글도 믿지 않으니, 어떻게 나의 말을 믿겠느냐?"
우리는 성전에서 환전상을 채찍으로 몰아내시는 예수님을 기억합니다(요 2:13-22).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을 자극하시려고 안식일에 의도적으로 병을 치유하시는(요 5:1–15; 누가복음 14:1–6; 마태복음 12:9–14) 매우 도전적인 예수님을 우리는 목격합니다.
예수님은 부드럽고 인자하고 자비로우십니다.
그러나 필요할 때는 공격적이시고 강력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전적으로 수동적이지 않았다는 증거를 더 보여줍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모세 율법에 대해 절대적인 전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정체성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지극히 개인적으로 비판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인간의 증언과 그의 기적이 그의 사역을 뒷받침하는 증거임을 지적하셨습니다(요 5:30-36). 이 대목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이 전문가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율법이 그들의 행위를 비난하고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지적합니다.
예수를 비판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대부분 바리새인들입니다(요 5:18). 그들은 율법주의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모세의 실제 율법에 많은 전통을 추가했습니다. 그들은 이 율법들을 따르면서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이 바리새파 전통의 주춧돌로 생각하는 모세가 그들을 죄인이라는 증거를 대면서 하나님께 고소할 것이라고 반론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정체성에 직접적인 도전장을 내밀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모세를 믿었다면, 예수에 대해 기록한 자신을 믿을 것이라고 모세의 율법만 믿는 그들을 질책하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이 유대 성경에 대해 잘 훈련된 전문가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과 그의 메시지를 거부합니다. 이는 무지가 아니라 진리를 보는 것을 고의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입니다(요 5:39-40). 예수님은 지역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을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쓴 글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하십니다. 구약성경이 예수를 예언했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지역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경우, 그들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거부했습니다(요 5:39–40). 진실에 고의로 저항하는 자에게는 증거가 무의미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적을 직접 목격하고도 불복종했습니다. 도마는 자신의 경험과 친구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심했습니다. 유다는 예수의 개인적인 친구였지만 예수를 배신하였다. 그들 모두 예수를 믿기를 거부한 실례들입니다.
단순히 안다는 것은 믿는 것과 같지 않으며,
'아는 것'은 '믿음'과 같지 않다 (야 2:19).
BIBLIOGRAPHY:
https://www.bibleref.com/John/5/John-chapter-5.html
개역개정 아래의 볼드체 성경구절은 WEB영어성경에 기반한 저의 개인 번역입니다 (따라서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구절 위 코멘트 중 존칭어의 텍스트는 저의 개인 멘트이고, 반어체는 인용, 번역 및 수정문구입니다.
인용 중 재인용은 이텔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예: 성경, 외국 학자설명 등)
'엄마의 성경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John)6:16-29(영생으로 이르는 음식) (0) | 2022.01.16 |
---|---|
요한복음(John)6:1-15(오병이어의 이적) (1) | 2022.01.15 |
요한복음(John)5:16-29(예수와 하나님의 관계) (0) | 2022.01.11 |
요한복음(John)5:1-15(치유와 안식일 논란) (0) | 2022.01.11 |
요한복음(John)4:43-54(아들을 살린 한 고관의 믿음) (0) | 2022.01.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