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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성경묵상

요한복음(John)6:60-71(떠나는 이와 남는 이)

by 미류맘 2022.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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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따르던 많은 무리가 예수의 영생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를 떠납니다. 예수의 열두 제자들도 예수의 '육(肉)은 무익하다'는 영적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나,  베드로가 예수께 영생의 말씀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60. Therefore many of his disciples, when they heard this, said, “This is a hard saying! Who can listen to it?”
61. But Jesus knowing in himself that his disciples murmured at this, said to them“Does this cause you to stumble?
62. Then what if you would see the Son of Man ascending to where he was before?
63. It is the spirit who gives life. The flesh profits nothing. The words that I speak to you are spirit, and are life.
64. But there are some of you who don’t believe.” For Jesus knew from the beginning who they were who didn’t believe, and who it was who would betray him.
65. He said, “For this cause I have said to you that no one can come to me, unless it is given to him by my Father.”

영생의 말씀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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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예수의 제자들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말했다. "말씀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예수의 제자들'이란 용어에서 우리는 열두 제자를 떠올리는데 그리스어로는 이 용어는 단순히 학생을 의미하는 mathētōn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를 따라다니며 예수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라면 제자로 불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열두 제자는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에 함께하는 열둘입니다. 여기에서 제자들로 불리는 사람들 대부분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대화에서 짜증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살과 피, 하늘에서 내려온 빵의 비유, 그리고 그들을 특히 혼란시킨 것은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정복하고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는 개념 때문이었습니다. 소위 제자들 중 일부가 '생명의 빵'으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이해했다고 해도, 희생제물을 암시하는 메시아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여호수아나 다윗을 기다렸을까요?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이 영어 번역으로 'hard saying(말씀이 어려운)'하다고 불평하는데 그리스어로 sklēros로 '무례하거나 참을 수 없는'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말씀은 단순히 '어려운' 것이 아닌 '용납할 수 없는, 참을 수 없는'의 의미였습니다.  

61. 예수께서 제자들이 그의 말씀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느냐?

예수께서 말씀에서 사용한 상징성 문제는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광야의 만나, 하늘에서 내려온 빵, 먹고 마시는 것으로의 , 예수의 살과 피, 영생으로 이르는 방법, 선행이 구원으로 이르지 않는다는 점,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를 믿는 것 등등... 예수님은 제자들의 불평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불평을 아시고 자신의 가르침이 그들에게 '장애물(stumbling block)이 되느냐?' 물으십니다. 장애물처럼 걸려서 넘어질 수 있는 요소의 개념입니다. 다음 말씀은 마치 핑퐁게임 같은 느낌이 들어서 성경학자의 설명을 인용.번역합니다(아래):

62. 그러면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겠느냐?

여기서 예수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언급한다(눅 24:50-53). 문자 그대로든 아니면 일반적으로든,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의 그의 말씀에 대한 반응과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반응을 비교하고 있다. 이것이 학자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첫 번째 가능성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그리스도가 다시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기분이 상할지 안할지 묻고 계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가르침이 너희를 불편하게 한다면 내가 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본다면 여전히 기분이 상할 것이냐?'는 것이다. 문제는 미래의 사건을 보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바꿀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들의 분함이 악화될 것인지 하는 것이다. 다른 가능한 의미는 만약 이것이 그들을 불편하게 한다면, 승천이 그들을 더욱 더 불편하게 할 것이라는 암시이다. 이런 해석 아래 예수님은 '이런 게 싫으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볼 때까지 기다려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63. 생명을 주는 것은 성령이시다. 육(肉)은 무익하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영이며 생명이다.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많은 불안은 그가 사용한 물리적 상징에서 비롯되었습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지칭하신 뒤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만이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십니다. 그의 육체가 생명의 빵이라는 생각은 곧 십자가 위에서 그의 희생적 죽음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앞선 말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직설적인 진술을 합니다.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누가 믿지 않는지, 또 누가 예수를 배반할지 알고 계셨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로 인해 무리가 그 주위로 모여들었지만,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말을 안해도 예수님은 아십니다: '누가 믿지 않는지, 그리고 누가 배반할지?' 예수님이 진실된 사역을 비유로 설명하실수록 무리는 더욱 분노하게 됩니다. 이러한 얕은 '팔로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떠나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을 증명하게 됩니다. 

65.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내 아버지께서 주지 않으시면 누구든지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에서 예수님은 '육(肉)은 무익하다' 말씀하셨다. 이는 그의 '먹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상징적이었음을 직접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그 언급은 전통적 믿음과 단순한 '관심'의 차이를 보여준다. 당시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역에 대해 피상적이고 이기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그들의 동기(요 6:26)와 성경에 대한 이해(요 6:27~29),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6:37-40)에 도전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 말하자면 그들의 '육(肉, flesh)'이 그들의 믿음을 좌절시킬뿐 아니라 반증한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이것에 대응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람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요 6:37)는 예수의 앞선 주장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논란이 되고 있는 운명론과 관련이 있다. 성경의 다른 구절들은 '선택'과 '부름받음' 등과 같은 개념들을 말한다. 운명과 선택에 대한 생각은 한두 구절만 살펴봄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만이 죄인을 회개하도록 부르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 속 군중의 반응은 직접적으로 이 생각을 증명한다. 관심과 행동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적인 믿음이다. 그 믿음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께 신용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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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At this, many of his disciples went back, and walked no more with him.
67. Jesus said therefore to the twelve, “You don’t also want to go away, do you?”
68. Simon Peter answered him, “Lord, to whom would we go? You have the words of eternal life.
69. We have come to believe and know that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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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그 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떠났고 다시 그와 다니지 않았다.

'그 때'는 그들을 끌어모았던 기적적인 병의 치유와 오병이어의 기적들이 모두 영적 진리를 기리키기 위함이라는 설명이 바로 끝난 직후였습니다. 듣기에 너무도 난해한 말씀과 가르침을 듣고 그를 따르던 무리(제자; 그리스어로 학생이라는 mathētōn)는 그를 떠납니다. 그들은 (인내를 가지고) 얕은 관심을 가지고 자신들이 원하는 이기적인 이익을 듣기 위해 (아직까지는 포기하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빵'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은 인내는 한도에 달한 것 같습니다. 불평(투덜거림, 요 6:41)이 다툼(요 6:52)과 심지어 짜증(요 6:60)으로 표출됩니다. 마음을 바꾸기 위해 의지가 필요한 그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짜증을 내면서 떠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지만 공짜 빵을 기다리는 그들의 이기적인 이익에 협조하지 않으셨고 그를 따르던 대부분의 무리는 이전의 육(肉)의 영적 상태로 돌아갑니다.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다. "너희들도 떠나기를 원하느냐?"

앞에서 대부분의 추종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듣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선호하는 길을 찾아 떠납니다. 그들은 떠남으로 자신의 믿음이 없음을 증명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그들 역시 떠날 생각이 있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직설적으로 열두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떠날래, 남을래? 물론 선택은 너희 몫이다.' 그 중에는 예수를 믿지 않았던 유다도 있습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제자는 베드로입니다. 그는 열두 제자의 신앙에 대하여 열정을 벋어나서 다소 주제넘는 진술('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음을 선언하는)을 합니다. 믿음에 자신이 넘쳤던 그는 유다의 심중을 알지 못한 것 같습니다.

68. 시몬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빵과 살, 피에 대한 예수님의 상징적인 가르침이 진짜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하는 제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요 20:9) 후에나 그 가르침을 이해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대부분 돌아서서 물러난 뒤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베드로의 반응에 대한 성경학자의 설명입니다(아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반응은 그리스도가 그들의 선호, 전통, 또는 개인적인 의견을 방해할 때 믿는 사람이 반응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베드로의 대답은 지극히 실용적이고 매우 논리적이다: '주님만이 진리를 알고 있는데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진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우리는 그것이 불편할지라도 진실만을 고수해야 한다. 베드로의 결론은 간단하고도 명료하다. '진리에 대한 다른 근거가 없는데 다른 곳을 찾을 수 있겠느냐?'

69. 우리는 주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을 믿게 되었고 또 알았습니다."

베드로은 대답은 '팔로워(follower)'와 '신자(believer)'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관심을 보이고 그의 사역에 찬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독교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실제로 기독교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우리'를 대변하는 고백과 주장은 충분히 열성적입니다. 그는 '우리' 중 한 명이 같은 결론에 이르지 못했음을 알지 못합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아십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칠 때, 귀신도 예수의 신성(하나님임)을 선언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막 1:24)

 

 

70. Jesus answered them, “Didn’t I choose you, the twelve, and one of you is a devil?”
71. Now he spoke of Judas, the son of Simon Iscariot, for it was he who would betray him, being one of the twelve.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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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선택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하나는 악마이다." 71. 예수께서는 가룟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는 열둘 중의 하나라 예수를 배반할 자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떠났지만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그의 추론은 간단하면서도 간단합니다: '진리에 대한 다른 근거는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다른 곳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요한 6:68–6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언에서 베드로는 잘못된 가정을 합니다. 그의 진술 중 '우리'라는 대상에는 예수를 배반하여 예수를 죽음으로 이끄는 가룟 유다가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 주변의 '모든 사람을 아셨고...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아셨다'(요 2:24-25) 요한은 앞에서 기록합니다. 그런 주님은 유다의 의중을 아셨지만 그를 열두 제자에 유지하신 이유는 그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셨던 예수님은 일찍이(무리가 예수를 왕으로 세우려할 때) 이 열두 제자를 무리에서 떼어 놓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을 겸손하게 하고 한편 무리의 선동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그 제자들 중에 유다가 있었고 지금 예수님은 그들 중 하나는 '악마'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의 곁을 떠나지 않은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와 함께 한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신에게 믿음의 교만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적이 그들 안에 있던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요 6:68-69, 이미지 소스: http://ldssotd.com/)

예수를 따르고 함께 했던 무리들과 비슷하게 우리는 대부분이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고 사역에 찬성합니다. 그런데 성경학자의 논평을 읽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됩니다. 나도 예수를 떠난 그들과 같이 기독교를 선호하지만 신자인가? 팔로워는 관심이 식으면 미련없이 떠납니다. 그러나 신자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남습니다. 

나는 단순한 팔로워인가, 아니면 신자인가? 
기독교를 선호한다고 해서 실제로 기독교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을 반복하시는데 말씀이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믿음이 확실하지 않을 때 베드로의 태도를 따르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확신도 없고 믿음도 확실치 않다. 그런데 예수만이 진리를 알고 있는데, 예수님만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는 예수만이 영생에 이르는 진리를 알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만 보고 예수만을 붙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BIBLIOGRAPHY
https://www.bibleref.com/John/6/John-chapter-6.html
개역개정 아래의 볼드체 성경구절은 WEB영어성경에 기반한 저의 개인 번역입니다 (따라서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구절 위 코멘트 중 존칭어의 텍스트는 저의 개인 멘트이고, 반어체는 인용, 번역 및 수정문구입니다.
인용 중 재인용은 이텔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예: 성경, 외국 학자설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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