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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성경묵상

요한복음(John)7:53-8:20(다시는 죄짓지 마라!)

by 미류맘 2022.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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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혀온 여자를 예수께 데려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용서하시고 다시는 죄 짓지 말라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은 '세상의 빛'이며 자신에 대한 증인은 하나님과 자신 둘임을 선언하십니다.

 

53. Everyone went to his own house,

7:1. but Jesus went to the Mount of Olives.
2. Now very early in the morning, he came again into the temple, and all the people came to him. He sat down, and taught them.

음행중에 잡혀온 여자가 용서 받다

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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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그리고 그들은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6.1 예수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다음날 매우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왔다. 예수께서 앉으시고 그들을 가르치셨다.  

7장 마지막 구절 괄호로 기록되어 있는 구절은 고대 원고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학자들은 이 구절을 확실치 않은 부분으로 설명합니다: "요한복음을 51절부터 요한복음 8장 12절까지 읽어보면 (끊김이 없이) 훨씬 매끄럽고 연결된 생각의 흐름이 보인다. 아마도, 그 구절들이 비슷한 주제, 즉 용서, 그리스도의 무죄 등의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2절에서 12절은 음행 중에 잡혀온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지역 종교 지도자들이 걱정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예루살렘 백성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그들은 다시 예수를 시험해서 백성들에 대한 그의 명성에 흠을 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함정을 어떻게 벗어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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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e scribes and the Pharisees brought a woman taken in adultery. Having set her in the middle,
4. they told him, “Teacher, we found this woman in adultery, in the very act.
5. Now in our law, Moses commanded us to stone such women. What then do you say about her?”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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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웠다. 

바리새인들은 다시 예수를 시험합니다. 예수의 추종자들 앞에서 예수를 당황시키기 위한 시도로 보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끌고와서 사람들 가운데 세웁니다. 누구의 눈에도 그 여자는 용서받을 수 없는 간음을 했고, 그들의 율법에 의하면 돌을 던져야 하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죄를 범한 여자는 있는데 같이 죄를 범한 남자는 어디에 있을까?

죄를 지은 여자를 가운데 세우는 행위는 그들이 의도한 드라마의 일부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극적인 상황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4. 그들이 예수께 말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여기서 '랍비(Rabbi)' 대신 '선생님(Teacher)'이라는 호칭의 사용은 아마도 비꼬기 위한 것일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을까 연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간음한 여자가 '현장에서' 붙잡혔다고 말하는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고 이전에 죄가 발견되었고 사전에 시나리오로 신중하게 선택되었을 가능성을 학자들은 말합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돌로 치기로 하신다면 '죄인의 친구'라는 그의 평판이 크게 훼손될 것입니다: "인자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마 11:19) 반면 예수가 모세의 율법을 거부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이단자로 매도하고 예수에 대한 죄를 입증할 수 있습니다.

5. 우리의 율법에 모세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령하였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여기에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생각의 흐름을 알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학자의 설명입니다(아래): 

구약은 간통을 저지른 남자와 여자에게 모두 사형을 선고했다(레 20:10, 신 22:22). 그러나 이 여인을 데려온 바리새파 사람들은 죄의 절반인 여자만 고발했다. 다음 구절에서 보듯이 그들의 목표는 예수님을 속여서 두 가지 실수 중 하나를 저지르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여자를 돌로 쳐서 죄인의 친구라는 평판이 훼손되거나(마 11:19), 자신을 법적 위험에 빠뜨리거나(요 18:31), 모세의 율법을 거부하고 거역하게 될 수 있다(요 8:6).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다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다. 그들은 간음죄를 지은 남자를 데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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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They said this testing him, that they might have something to accuse him of. But Jesus stooped down, and wrote on the ground with his finger.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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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고소할 구실을 얻기 위해 그를 시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 쓰셨다. 

예수님은 사역 중에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의 도전을 받습니다. 그들의 집요한 질문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현실의 도덕적 딜레마라는 좀 더 극적인 접근법을 사용하려고 시도합니다. 6절의 수수께끼 같은 상황을 성경학자의 설명을 통해 풀어보도록 합니다(아래):

예수님은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시며, 응답을 결정하실 때까지 생각을 정리하시는 것 같다. 예수님은 미끼를 물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처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다. 대신 땅바닥에 글을 쓰기 시작하신다. 이 수수께끼 같은 상황은 신약성경의 가장 풍부한 추측 자료 중 하나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쓰시는 글을 정확히 말하지 않는다.

바리새인들이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율법을 예수님이 썼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그는 이 사람들이 예수에게 인용하고 있는 구약성경의 인용구를 쓰고 있을 수있다. 어쩌면 그가 놀라운 응답(요 2:24-25)을 준비하기 위해 비평가의 이름들과 그들의 죄를 적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일부 사람들이 지적한 대로, 예수님께서 '현장에서 붙잡힌 또 다른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는 식의 질문을 쓰셨을 수도 있다. 정확히 뭘 썼는지 몰라도 우리가 아는 것은 예수님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배울 수 있는 원리를 이용해 이 딜레마에 성공적으로 답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뭐라고 쓰셨는지는 알 수 없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따라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죄인들 중 반만 데려왔기 때문에 율법을 완전히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율법도 맹목적인 처벌보다 자비를 우선시했다.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슥 7: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마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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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But when they continued asking him, he looked up and said to them, “He who is without sin among you, let him throw the first stone at her.”
8. Again he stooped down, and with his finger wrote on the ground.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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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들이 예수께 계속해서 묻자, 예수는 올려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자를 돌로 치라."

이 상황이 매우 흥미로운데 예수님은 어떻게 대응하실지 성경학자의 설명으로 들어봅니다(아래):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속여서 어떤 실수를 저지르게 하려고 했다. 대부분의 경우 예수님은 즉시 응답하여 행동하거나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땅에 무언가를 쓰신다(요 8:6). 예수의 대답이 없자 그들은 예수님께 죄에 걸린 이 여자를 어떻게 할 것인지 거듭 묻는다.

바리새인들이 놓은 함정은 예수에게 딜레마를 선물하는 것 같다. 율법은 누구든지 간음하는 자(남자와 여자를 모두)에게 죽음을 선포한다(레 20:10; 신 22:22). 그러나 로마법에서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사형을 집행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요 18:31), 예수는 '죄인의 친구'(마 11:19)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예수님의 대답은 함정을 뚫는다. 땅에 무언가를 쓰는 행동은 이 구절에서 두 번 언급되는데, 이는 그것이 예수의 대답의 의도적인 부분이었음을 암시한다. 아마도 그는 관련된 구약성경 구절들, 또는 관련있는 사람들의 이름과 죄명을 썼을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확신할 수 있다. 예수님은 마침내 말씀을 하실 때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율법에 부족한 부분 중 하나를 지적한다. 즉 예수를 고소하려는 사람들이 바로 사형 집행 절차를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이다(신 17:7). 그러나 로마법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사형을 집행하는 것을 금지한다(요 18:31). 

성경이 말하는 간음의 정의도 애매하다. 예수님께서 '간음하지 말라' 가르치시면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 (마 5:27-28)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 말씀하신다: "판단하되 공의롭게 판단하라" (요 7:24) 심지어 예수님은 그 여자를 고발하는 자들 중에 일부의 남자들이 실제로 간음을 했다고 주장하실 수도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 여자를 고발한 사람(들)이 '먼저 그 여자를 돌로 치라' 요구하고 있다. 율법에 현장에서 간음한 여성을 붙잡은 사람이 그 여자를 죽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의 성경학자의 설명을 살펴보면, 범죄한 여자에게 우선 바리새인들이 돌을 들어야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모세의 율법과 바리새인들의 자격을 살펴봅니다. 하나, 그들은 (음욕을 품어도 간음하였다 성경을 말하는데) 정말로 죄가 없을까? 둘, 그들이 범죄 현장을 목격하였다면 그들이 돌을 들어야 하는데, 로마법에 의하면 지도자들은 사형 집행을 할 수 없습니다. 셋, 누군가가 돌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현장에서 붙잡은 남자와 여자를 모두 세워야 하는데, 범죄의 반토막 남자는 어디 있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그렇게 사랑한다면, 맹목적인 처벌보다 율법이 명령한 정의와 긍휼과 자비를 우선시했는지?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 8:7)

이 딜레마 상황에서 예수님이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만약 네가 율법에 호소할 것이라면 율법에 따라 집행하라!" 땅에 쓰셨던 내용도 그런 내용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않을까요?

요컨데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실제로 율법을 따르는 데 관심이 없다고 지적합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를 비난하는 이유가 율법에 있다면, 그들은 적어도 율법 전체를 따라야 하는게 그들은 반쪽만 따릅니다. 이 딜레마는 그들 자신에게 돌아오고 그들이 파놓은 함정 속에 스스로가 빠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셨다.  

예수님이 다시 땅에 무언가를 쓰시는데, 이 극적인 행동으로 답변하시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그것이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침묵합니다. 두 번 이상 언급되었다는 것은 이는 중요한 대답의 한 부분임을 시사합니다. 그 내용을 보았는지 (기록이 없으나) 다음 절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해설가의 설명입니다(아래):

일반적으로 예수님은 이 여자를 데려온 사람들이 영적으로 (심지어는 문자적으로) 실제로 율법을 따를 의사가 없었음을 증명한다. 간음을 저지를 사람은 사형(레 20:10; 신 22:22)의 대상이나, 율법은 두 죄인을 모두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율법은 고발하는 자가 스스로 사형을 집행하도록 규정한다(신 17:7). 구약성경은 거룩함만큼이나 올바른 판단과 자비를 요구한다(잠 21:10; 슥 7:8-9; 마 23:23). 이것은 도덕성에 대한 고발자들의 주장에 맞선 예수님의 도전과 결합되어 그 결과는 완전한 반전을 초래한다. 그리고 고발자들 모두가 현장을 떠난다(요 8:9).

결과적으로 이 극적인 상황으로 고발자들은 예수의 평판을 실추하는데 실패할 뿐만 아니라, 이는 예수를 더 슬기롭게 보이도록 하고, 거룩한 것처럼 행동하던 그들의 거룩함은 (예수님이 무엇인가 쓰시던 바로 그) 땅으로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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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They, when they heard it, being convicted by their conscience, went out one by one, beginning from the oldest, even to the last. Jesus was left alone with the woman where she was, in the middle.
10. Jesus, standing up, saw her and said
“Woman, where are your accusers? Did no one condemn you?”
11. She said, “No one, Lord.” Jesus said, “Neither do I condemn you. Go your way. From now on, sin no more.”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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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이 되어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떠나고, 마침내 예수와 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 남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떠나고, 남은 사람은 예수님과 여자 두 사람만 남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은 바리새인들이 떠난 지금, 오직 예수님과 여인이 군중들 가운데 '한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고발자들이 사라진 지금 군중 앞에 남은 사람은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뿐입니다. 그 현장의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10. 예수께서 일어나서 여자를 보고 말씀하셨다. “여자여, 너를 고소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 너의 죄를 물은 사람이 아무도 없느냐?" 11. 여자가 대답했다. "주님,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에게 죄를 묻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이 상황은 매우 극적입니다. 죄를 범한 죄인이 끌려왔고 여자를 끌고 온 사람들은 자리를 떠났습니다. 도덕적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유죄인 죄인 한 명이 (관중이 없는) 심판대에 올라와 있습니다. 죄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온전히 죄가 없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정죄한 죄인을 처벌할 수 있는 확실한 권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 상황을 풀어나가실까요?

예수님은 그녀를 고소한 사람들이 현장에 없음을 확인하시고, 그 여자의 죄가 작지 않음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가라.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예수님은 어떤 처벌도 내리실 수 있지만 허락된 일을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벌보다 긍휼과 자비가 우선하는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시지만, 여자의 행위가 죄악임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십니다. 예수님은 '올바른 판단'(요 7:24)을 하는 것을 선택하십니다. 한 성경학자의 설명입니다: "어떤 일을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 8:11, 이미지 소스: https://achristianpilgrim.wordpress.com/)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12. Again, therefore, Jesus spoke to them, saying, “I am the light of the world. He who follows me will not walk in the darkness, but will have the light of life.”

나는 세상의 빛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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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 후에 예수께서 다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복음의 7개의 'I AM'구절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 날, 가버나움에서 무리에게 설교를 하고 있을 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I am the bread of life)"(요 6:35) 이것은 두 번째 'I AM' 진술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자신을 이스라엘로 보낸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이다...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라고 말하라고 하십니다(출 3:14).

'I AM' 진술은 하나님의 본성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I am the light of the world)." 예수님을 빛으로 은유한 배경을 성경학자는 설명합니다(아래):

이 사건은 예루살렘에서 초막절 축제 기간에 일어난다.. 이 주요 축제의 일부로, 제사상들의 낡은 의상으로 만든 심지를 사용하여 램프가 점등되었다. 히브리 사상에서 빛은 강력한 은유였다(시 84:11; 말 4:2). 유대인에게 '빛'은 구원과 지식, 그리고 선함의 상징이었다. 예수님이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주장이었다. 게다가, 이 구절의 그리스어는 예수가 '하나의 빛(a light)이 아니라 '유일한 빛의 근원(the light)'이라고 주장한 것을 나타낸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https://open.life.church/)

13. The Pharisees therefore said to him, “You testify about yourself. Your testimony is not valid.”
14. Jesus answered them, “Even if I testify about myself, my testimony is true, for I know where I came from, and where I am going; but you don’t know where I came from, or where I am going.
15. You judge according to the flesh. I judge no one.
16. Even if I do judge, my judgment is true, for I am not alone, but I am with the Father who sent me.

13.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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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했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해 증언하니, 당신의 증언은 참되지 않소." 14.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증언하여도 내 증언은 참되니,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얼마 전, 예수님은 지역 종교 지도자들과 그의 가르침과 치유 사역을 놓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세 가지 증거에 호소하셨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을 통한 사람의 증언(요 5:33), 예수님의 이적을 통한 증언(요 5:36), 그리고 성경의 기록을 통한 증언(요 5:39)였습니다. 앞 구절에서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고 주장한 뒤 바리새인들은 그러한 증거의 기준으로 예수님께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 스스로 증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진술을 위해 하나님과 예수님만이 증언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위에서 오신 예수님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고 계시지만, 땅에 속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어디서 오셨고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만,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은 참되다.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다. 

예수님은 판단에 대한 주제를 언급하십니다. '세상의 빛'(요 8:12)이라는 자신의 주장에 도전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육으로 판단한다' 질책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판단하지 마라' 명령을 내리시지는 않았습니다. '판단하되, 올바른 판단을 하라'(요 7:24)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 영적으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 속한 곳이 다르고 구하는 것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영(肉)에 속하시고 위에서 오셨지만 우리와 같은 바리새인들은 육(靈)에 속하고 땅에서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각자 자신의 소명과 일을 다한 뒤,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사람들은 흙이 되어 땅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에서 이 두 그룹의 역할이 확연히 차이납니다. 예수님은 판단(심판)을 하시고 인간들은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심판하실 예수를 심판하려 합니다. 이 자체가 모순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는 예수와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자들을 심판(요 3:18; 3:36)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판단(심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참되고 온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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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It’s also written in your law that the testimony of two people is valid.
18. I am one who testifies about myself, and the Father who sent me testifies about me.”

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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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은 참되다 기록되어 있다. 18.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증언하는 사람이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해 증언하신다."

예수님이 여기서 '너희 율법'이라는 문구를 사용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을 언급하실 때 '율법' 또는 '모세의 법', 즉 '성경'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렇게 그들의 율법과 예수의 율법을 별도로 말하시는 것은 그들이 성경적이지 않는 랍비의 율법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둘의 증언도 다릅니다. 예수를 심판하려 하는 그들의 잣대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지상의 증언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의 문제를 말씀하실 때 이 증거의 필요성을 인정하셨습니다(요 5:30~47) 그러나 여기서 예수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주장을 변호하십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요 8:1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는 (예수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기 때문에 예수가 자신에 대해 증언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예수님은 두 명 즉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를 증언(증인)으로 세우십니다. 이 두 증언이 대립하면서 바리새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바리새인들의 주된 목표는 논리와 율법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언급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며 대화를 전환하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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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They said therefore to him, “Where is your Father?” Jesus answered, “You know neither me, nor my Father. If you knew me, you would know my Father also.”
20. Jesus spoke these words in the treasury, as he taught in the temple. Yet no one arrested him, because his hour had not yet come.

19.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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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러자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에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만일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20. 예수께서 이 말씀을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그를 잡는 사람이 없었다.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대화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학자의 설명을 인용합니다(아래):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요 8:12)이라 하면서 자신이 '아버지'라고 부르신 하나님과 동등한 판단을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상의 것들을 실제로 본 유일한 사람으로서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스스로 증언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그가 행한 기적은 바리새파 사람들 자신의 논리에 의해 그의 사명이 하나님에 의해 승인되었다는 증거였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아버지'를 말할 때 무슨 뜻인지 대화를 돌린다.

이 '아버지'란 용어는 바리새인들에게 혼란스럽고 논쟁의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성부 성령 삼위일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았고,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여기서 묻는 질문도 예수님을 은근히 파고드는 것일 수 있다. 이 사람들이 나중에 그에게 던질 모욕 중 하나는 그의 출생에 대한 언급으로, 그가 지상의 아버지가 없었다는 것은 사실 그가 사생아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덧붙혀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에 정통하고 하나님을 누구보다 더 잘 안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일격을 날리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만일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요 8:19) 이는 신성에 대한 자신의 주장이십니다. 

예수와 바리새인들의 날선 대화가 계속되고 있으나 아직 예수를 체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BIBLIOGRAPHY
https://www.bibleref.com/John/8/John-chapter-8.html
개역개정 아래의 볼드체 성경구절은 WEB영어성경에 기반한 저의 개인 번역입니다 (따라서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구절 위 코멘트 중 존칭어의 텍스트는 저의 개인 멘트이고, 반어체는 인용, 번역 및 수정문구입니다.
인용 중 재인용은 이텔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예: 성경, 외국 학자설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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