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소경이었던 남자를 다시 불러 심문하고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임을 확신합니다. 그가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믿음을 확인하고 축복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은 눈먼 자를 눈뜨게 하고 눈뜬 자를 눈멀게 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24. So they called the man who was blind a second time, and said to him, “Give glory to God. We know that this man is a sinner.”
25. He therefore answered, “I don’t know if he is a sinner. One thing I do know: that though I was blind, now I see.”
24.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
24. 유대인들이 소경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로 불러 그에게 말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그 사람이 죄인인 것을 안다."
두 번째로 맹인이었던 사람을 불러 다시 심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말하면서 진실을 말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말은 오늘날 판사가 피고에게 '와서 진실을 말하라...'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앞에서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그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라고 결정했습니다. 여기서는 '우리는 예수가 죄인인 것을 안다'고 주장하며 그 남자를 노골적으로 협박합니다.
25. 그가 대답했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 하나는 제가 앞 못 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남자의 대답은 놀랍도록 훌륭하고 요약된 신앙고백과도 같습니다. 학자의 설명을 인용합니다(아래):
성경은 시각(또는 빛)을 믿음의 비유로 사용한다. 이 사람은 훈련받은 학자도 아니고, 부유하지도 않고, 유식하지도 않다. 그는 예수의 사역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확실히 아는 것은 '앞 못 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것은 '우리 자신의 삶에 그리스도의 영향'이라는 증언의 초석이다.
이것은 그가 예수와의 짧은 만남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일까요? 5장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앓아온 남자를 치유한 뒤의 태도와 확연하게 다릅니다.
--------------
26. They said to him again, “What did he do to you? How did he open your eyes?”
27. He answered them, “I told you already, and you didn’t listen. Why do you want to hear it again? You don’t also want to become his disciples, do you?”
26.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
26. 그들이 그 사람에게 물었다.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했소? 어떻게 당신의 눈을 뜨게 했소?" 27. 그 사람이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미 말해 주었는데 당신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왜 그것을 다시 듣고 싶으십니까?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그들의 질문은 계속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판사와 피고 사이에서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것은 일반적인 질문 전략인 모양입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이 남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징후를 찾고 있습니다: 예수가 그에게 '무엇'을 했고, '어떻게' 눈을 뜨게 했는지? 그러나 그들의 전략은 먹히지 않습니다. 그 남자는 '이미 말한 것을 왜 다시 듣고 싶으냐?' 묻습니다. 그의 모습에서 놀랍도록 대담하고 용감하고 고도의 전략적인 접근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남자는 앞 못보는 거지였는데 고도의 교육을 받은 종교 지도자들을 철저히 당황시킵니다. 배우지 못한 거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미 말을 했다. 너희도 예수를 믿고 싶어서 다시 묻는 거냐?' 그의 어투에서 빈정거리는 조롱이 느껴집니다.
--------------
28. They insulted him and said, “You are his disciple, but we are disciples of Moses.
29. We know that God has spoken to Moses. But as for this man, we don’t know where he comes from.”
30. The man answered them, “How amazing! You don’t know where he comes from, yet he opened my eyes.
31. We know that God doesn’t listen to sinners, but if anyone is a worshiper of God, and does his will, he listens to him.
32. Since the world began it has never been heard of that anyone opened the eyes of someone born blind.
33. If this man were not from God, he could do nothing.”
34. They answered him, “You were altogether born in sins, and do you teach us?” They threw him out.
28.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
28. 그들이 그 사람에게 욕을 하며 말했다.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유대인들은 교육받지 못한 거지의 입에서 그런 발언이 나올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들의 반응은 앞에서 예수와의 논쟁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에서도 그랬듯이, 그들은 앞 못 보던 한 거지의 도전에 분노와 모욕으로 응답합니다. '너희도 예수의 제자가 되고 싶냐?'는 거지의 빈정거림에 모욕을 느낀 그들은 '너나 그의 제자하라,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대응합니다.
29.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이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여기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말합니다. 그들이 목격한 예수의 기적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에, 그리고 그들이 만든 율법에 의하면 예수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또 누구보다도 더 구약성경을 알지만 예수가 성경에 기록된 '약속된 분'임을 믿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그들 안에 깊이 깔린 교만, 고집, 이기심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해할 논리와 머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편견에 대해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할 때, 마지막 반응인 분노와 모욕으로 대응합니다.
30. 그 남자가 대답했다. "이상한 일입니다! 그가 내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그분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니 말입니다.
앞 못 보던 거지의 비꼬는 대답은 그들의 연약한 자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성의 부족을 드러냈습니다. 여기에서 거지는 물러서지 않고 훨 씬 더 강력한 논리로 교육받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공략합니다. 여기서 그는 그들의 분노와 모욕에 반응합니다. 그의 말투는 냉소적이고, 신랄하며, 공격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요점은 앞에서 말했던 것과 거의 같습니다(요 9:25).
31.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의 말을 듣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교육받은 유대인들은 앞 못 보던 거지의 증언에 합리적인 주장을 전개하지 못합니다. 거지의 놀랍도록 논리적인 증언에 그들은 그저 모욕과 분노로 대응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모세의 제자라고 주장했지만, 예수님이 누구시며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거지는 비록 그들이 예수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가 치유 기적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분한 증거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32.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의 말은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학자의 설명입니다(아래):
우리가 아는 한, 소경으로 태어나 앞을 보게 된 경우는 이 남자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람이다. 예수의 기적은 예수의 능력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예언 또한 성취시켰다. 성경에서 빛과 어둠, 또는 시력과 실명과 같은 개념은 영적인 문제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전 구절에서, 최근에 치유된 남자는 예수님이 그에게 행하신 기적적인 치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는 증거(요 9:30-31)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기적은 독특히다.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일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상 다른 예언자나 제사장이 한 적이 없는 일을 하셨다. 앞서 소경이었던 사람을 심문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거부했다.
33. 그분이 만일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이 아니라면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의 기적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죄인'으로 배척하려 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욕에 대한 이 남자의 반응입니다. 여기서 그는 명료하고 논리적인 말로 진술합니다. 그의 요점은 예수의 기적 자체가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 보내졌다는 충분한 증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 예수께 가져온 결론과 거의 일치합니다: "선생님,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에게서 오신 선생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이 표적을 행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요 3:2)
이 시점에서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매우 당혹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이 틀렸음을 밝히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기적을 목격한 그 남자에게 분노와 모욕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로부터 상식적인 영적 진실을 배웠습니다.
34. 유대인들이 그에게 대답했다. "너는 죄에서 태어났는데도 우리를 가르치려 드느냐?" 그리고 그를 내쫓아버렸다.
앞에서 유대인들은 '예수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주장했고, 치유된 사람은 '예수의 기적이 그가 누구인지를 충분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습니다(요 9:25). 그러자 그들은 예수가 '죄인'이라고 주장했고, 치유된 사람은 '죄인'은 하나님의 권능에 접근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요 9:30-31).
여기에서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남자의 빈정거림이 가미된 논리적인 가르침에 당황한 유대인들은 다시 분노와 증오와 모욕으로 그에게 반응합니다. 논쟁 중에 상대방의 주장에 반박하거나 그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인신공격을 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영적 위선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종류의 반응입니다 (요즘 정치판의 가십 수준의 논쟁에서도 볼 수 있는). 논리적으로 또 합리적으로 더 이상 논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논쟁에서 벋어나 언어폭력과 인신공격에 의지하는 전략입니다. 이는 가장 저열한 방식의 일종의 전술이 아닐까요?
남자에게 '죄에서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가르치려 드느냐?'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말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8장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다. (너처럼)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셔서 여기 와 있다' (요 8:41) 자신의 말을 하는 척하면서 상대방의 오점과 비교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은 최대한 폄하하고 자신의 신분은 최대한 높이는 비열한 전략입니다. 그리고 가장 신분이 낮은 거지에 의해 자신의 위선이 폭로되자, 극도로 당황한 그들은 그 남자를 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를 내쫓듯 쫓아냅니다.
--------------
35. Jesus heard that they had thrown him out, and finding him, he said, “Do you believe in the Son of God?”
36. He answered, “Who is he, Lord, that I may believe in him?”
37. Jesus said to him, “You have both seen him, and it is he who speaks with you.”
38. He said, “Lord, I believe!” and he worshiped him.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
35.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 말씀하셨다. “너는 인자를 믿느냐?" 36. 그가 대답했다. "주님, 그가 누구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한 때 장님이었던 이 남자는 예수님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가서 씻으라(요 9:7)'는 예수의 명령을 순종하고 앞이 보이게 되었을 때, 예수는 자리를 떠난 뒤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그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인자를 믿느냐?' 물으십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예수님은 당대방의 믿음을 물어보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학자는 설명을 인용.번역 및 편집합니다(아래):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의 개념과 크게 연관된 문구이다. 이 남자는 자신이 예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했지만(요 9:30-31), 예수의 치유 능력을 경험하고 예수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요 9:33)임을 믿고 있다. 여기서 남자는 예수의 질문에 자신의 무지를 인정한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는 기적에서 아이의 아버지의 외침과 유사하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막 9:24)
여기서 치유된 남자는 진리를 따르기를 원하지만 그 방법을 모를 뿐이다. 이는 완고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성경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 성경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는 강한 대조를 이룬다.
위의 설명이 이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 때 장님이었던 남자는 (배운 적도 들은 적도 없기 때문에) 예수가 메시아임은 알지 못합니다. 오직 그가 경험을 통해 알고 믿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졌다'는 것입니다(요 9:33). 그리고 마가복음 9장에서 아버지의 외침처럼 '믿사오니, 주님 믿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게 호소합니다.
3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분을 보았다. 지금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38. 그가 "주님, 믿습니다!" 하며 그는 예수께 경배드렸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한 때 장님이었던 이 남자의 반응은 정반대이다. 이 남자는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한 변명을 찾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증거를 받아들인다. 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따르기를 원하지만 자신의 무지를 호소한다(요 9:36). 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진리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요 7:17) 이미 알고 있는 모든 지식(요 5:39-40)을 거부한다."
'인간의 아들' 메시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그 남자에게 예수님은 '바로 네 앞에서 너에게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 인자이다' 말씀하십니다. 남자가 예수께 경배드리며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 남자는 보는 것을 믿었지만 유대인들은 보고 싶은 것을 믿었습니다.
--------------
39. Jesus said, “I came into this world for judgment, that those who don’t see may see; and that those who see may become blind.”
40. Those of the Pharisees who were with him heard these things, and said to him, “Are we also blind?”
41. Jesus said to them, “If you were blind, you would have no sin; but now you say, ‘We see.’ Therefore your sin remains.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
3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다.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을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보는 자들 vs. 보지 못하는 자들'을 언급하시면서 거지와 종교지도자들이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을 설명하십니다. 이 두 그룹은 섞일 수 없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하늘과 땅의 차입니다. 거지는 평생 앞을 못보는 맹인이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종교지도자들은 보는 것을 거부하는(자신이 보기를 원하는 것만을 보는) 눈뜬 장님입니다.
여기에서 앞을 보지 못했던 남자와 같은 그룹은 그들의 진실한 믿음으로 인해 '시각'과 '지식'을 모두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부족함과 필요함을 인정하고 구했기 때문에 보는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같이 자신의 영성으로 인해 교만하고 이미 필요한 지식이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가지고 있던 보는 능력마저 빼앗깁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지식(요 5:39-40)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편견으로 인해 눈이 멀 것이며(고후 4:4), 결국 그들이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할 것입니다(요 7:17).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은 그들이 원했던 것을 얻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맹인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영적 시력을 찾는 자(지금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영적 시력을 주고,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자('우리는 본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영적인 소경이 되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사역임을 밝히십니다. 그러자 다음 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오만함으로 응답합니다. 본질적으로 그들의 반응은 '당신은 분명히 우리가 영적으로 장님이라고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 땅으로 보내신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볼 수 있는 '구원'을, 이미 보는 자(스스로 볼 수 있는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눈이 머는 '심판'을 내리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구원과 심판의 사명을 다하십니다.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예수께 물었다. "우리도 앞을 보지 못한단 말이오?"
예수님에 대한 논쟁의 일환으로, 바리새인들은 이제 날카로운 질문을 한다. 이것은 수사학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 대답이 명백한 "아니오"라는 가정하에 질문한다. 그들 자신의 기준으로 볼 때, 바리새인들은 가장 도덕적이고, 교육도 잘 받았고, 영적으로도 인간의 능력이 있었다. "내가 영성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느냐?" 비꼬며 웃는 현대의 바리새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의 응답은 이것이 바로 그렇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리새인들에게 더 나쁜 것은 그들의 오만과 예측이다. 자신의 나약함과 진리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사람은 용서와 은혜를 찾는다 (요 9:35-38; 막 9:24). 지식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자기 기준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요 9:41).
41.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우리는 본다' 하고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 죄가 아직 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메시아를 볼 때 그를 알아보아야 한다. 예수 시대에는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대해 그들은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이 사람들은 누구보다 영적 '시력(sight)'을 가지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바리새파 사람들(요 3:1–2; 눅 23:50–51)은 사실 진리보다 전통과 지위에 더 관심이 있었다(요 5:39–40; 5:45–47).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진리를 찾아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은혜와 용서를 받는다(막 9:24; 요 9:35-38; 마 7:7-8). 그러나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자, 영적 시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는 그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다(야 3:1). 이는 특히 바리새인들과 같이 지식을 가지고 있고 의도적으로 그것을 무시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 9:25)
BIBLIOGRAPHY:
https://www.bibleref.com/John/9/John-chapter-9.html
개역개정 아래의 볼드체 성경구절은 WEB영어성경에 기반한 저의 개인 번역입니다 (따라서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구절 위 코멘트 중 존칭어(검정색)의 텍스트는 저의 개인 멘트이고, 반어체(옅은 청색 텍스트)는 인용, 번역 및 수정문구입니다.
인용 중 재인용은 이텔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예: 성경, 외국 학자설명 등)
'엄마의 성경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John)10:22-42(나와 아버지는 하나) (0) | 2022.01.31 |
---|---|
요한복음(John)10:1-21(나는 '양의 문') (0) | 2022.01.29 |
요한복음(John)9:13-23(내가 씻고 보나이다!) (0) | 2022.01.28 |
요한복음(John)9:1-12(가서 씻으라!) (0) | 2022.01.27 |
요한복음(John)8:42-59(이해 못함과 이해 안함) (0) | 2022.01.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