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안식일에 치유를 받은 보게 된 맹인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려옵니다. 남자는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고 씻으니 보이게 되었다' 진술합니다. 그 기적을 믿지 못하는 그들은 다시 남자의 부모를 부릅니다.
13. They brought him who had been blind to the Pharisees.
14. It was a Sabbath when Jesus made the mud and opened his eyes.
15. Again therefore the Pharisees also asked him how he received his sight. He said to them, “He put mud on my eyes, I washed, and I see.”
16. Some therefore of the Pharisees said, “This man is not from God, because he doesn’t keep the Sabbath.” Others said, “How can a man who is a sinner do such signs?” There was division among them.
보게 된 맹인과 바리새인들
13.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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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그 사람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갔다. 14. 예수께서 진흙을 만들어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다.
사람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갑니다. 그는 자신이 왜 보게 되었는지 거의 몰랐고, 예수는 최근 이 종교 지도자들과 지속적으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예수의 이 치유는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일어났는데 예수는 안식일에 '일'하셨고 '진흙을 썪는' 일을 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전통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로서 그들이 여러 사건을 조사해야 하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묻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굳은 마음과 위선적인 태도에 있었습니다.
15. 그래서 바리새인들도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는 그들에게 대답했다. "그분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고, 내가 씻으니 보게 되었습니다." 16.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그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어떤 사람은 "죄인인 사람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할 수 있겠소?" 말했다.
눈을 뜨게 된 사람은 바리새인들 앞에서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두 번째로 질문을 받습니다. 그 사람은 같은 대답을 반복합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의 논쟁이 끊임이 없습니다. 그들이 지키는 모세의 율법이 왜 그들을 오만하고 위선적인 소위 종교 지도자들로 만들었는지 학자의 말을 인용합니다(아래):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은 사실 매우 긍정적인 평판을 받았다. 그들은 전통에서 발전한 엄격한 규칙에 따라 생활하며 매우 도덕적이었다. 그 전통들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복종을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그러한 전통을 실제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것으로 여겼다. 이것은 냉정한 율법주의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대 그들(us-versus-them)" 버전의 영성의 오만함을 초래했다.
위의 설명은 기적을 목격해도 그들이 옳고 그름 또는 선과 악을 결정하는 기준은 기적을 행한 예수님이 그들의 해석에 동의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설명 같습니다. 즉,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해석을 오만하고 위선적인 그들 자신이 만든 율법임을 지적하시자,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 예수를 죄인으로 치부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기독교 이단에서 나타나는 팩트입니다. 많은 이단들이 주일이 아닌 특정 예배의 날이나 그들만의 성경 번역 등 특정한 교리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죄인, 이단자, 거짓 예언자로 즉시 판단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만의 교리를 만들고 그들 이단끼리 똘똘 뭉쳐서 이상한 반기독교 단체를 만들고 자신이 스스로 만든 '신(god)'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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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Therefore they asked the blind man again, “What do you say about him, because he opened your eyes?”
He said, “He is a prophet.”
18. The Jews therefore did not believe concerning him, that he had been blind, and had received his sight, until they called the parents of him who had received his sight,
17.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18.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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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래서 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 남자라 말했다. "그는 예언자입니다." 18.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이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않고, 눈을 뜨게 된 남자의 부모를 불러
바리새인들은 보게 된 사람에게 계속 심문합니다.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그들은 자신의 전통과 해석에 집중합니다. 자신의 전통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다'(요 9:16) 주장합니다. 그들은 다시 답변을 강요합니다. 그의 답변을 짧고 굵습니다: "그는 예언자입니다." 그는 멀었던 눈을 씻으라는 말씀 이후에 예수님을 보거나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그가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듣고자 원하는 답변을 이미 정하고 그 답변을 끌어내려고 노력합니다. 이번에는 치유받은 사람의 부모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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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and asked them, “Is this your son, whom you say was born blind? How then does he now see?”
20. His parents answered them, “We know that this is our son, and that he was born blind;
21. but how he now sees, we don’t know; or who opened his eyes, we don’t know. He is of age. Ask him. He will speak for himself.”
22. His parents said these things because they feared the Jews; for the Jews had already agreed that if any man would confess him as Christ, he would be put out of the synagogue. 23Therefore his parents said, “He is of age. Ask him.”
19.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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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다는 당신의 아들이요? 그런데 지금 어떻게 보게 되었소?"
요한복음에서 '유대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종교적 지도자들입니다. 누구보다도 예수의 실체를 잘 알아야 할 이 사람들로부터 예수에 대한 가장 혹독한 비판과 저항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남자가 앞을 보게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의 부모를 부릅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과 그의 기적을 거부할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이 사람이 정말 당신 아들이냐?'고 묻기보다는 부모 스스로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가정하는 질문을 유도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서 치유된 사람의 이름은(유대인들이 만든) '장님으로 태어났다고 말하는 이 사람'입니다. 그들의 질문에는 위협도 느껴집니다.
20. 그의 부모들이 대답했다.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이고 맹인으로 태어난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21. 그런데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나이를 먹은 사람이니, 자신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진리를 밝히기 위함이 아니고, 예수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해 그 남자의 부모를 심문하여 소위 '장님으로 태어났다고 말하는 이 사람'이 정말로 그들의 아들인지, 그리고 그가 장님으로 태어났는지에 대해 심문합니다. 그의 부모는 짧고 소심하게 이 두 가지 사실을 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아들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진술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회당에서 쫓아낼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그 선을 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고 구체적인 질문은 아들에게 물으라고 말합니다.
22. 그의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이미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회당애서 쫓아내기로 동의하였기 때문이다. 23. 그래서 그 사람의 부모가 "그가 나이를 먹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보시오"라고 말한 것이었다.
앞에서 유대인들의 심문에 부모가 한 짧고 사실에 근거한 답변에서 그들이 이 논쟁에 관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한 학자의 설명을 빌면, 현대적 표현으로 그들은 '그는 장님으로 태어난 우리의 아들입니다. 그것 외에는, 우리는 말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편 유대인들의 심문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누가, 그리고 어떻게' 그 기적을 행했는지 묻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가 메시아가 아님을 밝히는 것이나 그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동의한 것을 알기 때문에 치유된 남자의 부모는 극도로 말을 아낍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치유를 받은 남자의 부모는 논쟁이 관여하고 싶지 않은데 23절의 반복되는 구절이 이를 설명합니다. 그의 부모은 대답은 'no comment'입니다. 아들이 직접 증언할 나이가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치유받은 남자의 진술은 유대인들이 믿지 않고 그의 부모의 반응도 '할 말 없다'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이미 마음을 굳혔기 때문에 기적의 의미는 그들에게 사라졌습니다. 유대인들과 예수님과 치유받은 남자 사이에서 어떤 공방이 일어날까요?
예수가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요 9:15)
이스라엘 성지순례 갔을 때 일행과 달리기 하면서 실로암 연못을 잠시 보았는데 연못 흔적만 있던 기억입니다.
BIBLIOGRAPHY:
https://www.bibleref.com/John/9/John-chapter-9.html
개역개정 아래의 볼드체 성경구절은 WEB영어성경에 기반한 저의 개인 번역입니다 (따라서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구절 위 코멘트 중 존칭어의 텍스트는 저의 개인 멘트이고, 반어체는 인용, 번역 및 수정문구입니다.
인용 중 재인용은 이텔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예: 성경, 외국 학자설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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