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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성경묵상

요한복음(John)10:1-21(나는 '양의 문')

by 미류맘 2022.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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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양의 문' 비유를 통해 자신이 유일한 합법적인 구원 수단이고 위선적인 유대인들은 도둑이며 강도라고 주장하십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 죽을 것이고 부활할 것임을 약속합니다.

 

1. “Most certainly, I tell you, one who doesn’t enter by the door into the sheep fold, but climbs up some other way, the same is a thief and a robber.
2. But one who enters in by the door is the shepherd of the sheep. 

양의 우리 비유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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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양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길로 넘어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양의 목자다. 

9장에서 유대인과 예수님의 논쟁 이후에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 10장으로 연결된다고 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목자의 개념을 사용하여 비유하시는 3가지 중 첫 번째입니다. 

예수님은 '양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아마도 울타리로) 넘어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다' 말하면서 첫 번째 비유를 시작합니다. 예수 시대의 양 우리에 대한 학자의 설명입니다(아래):

그 시대의 양 우리들은 비교적 높은 담과 좁은 출입구로 지어졌다. 그 구조는 동물들과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올 수 있도록 통제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하나의 우리에 여러 마리의 떼가 수용될 수 있었다. 양들은 목동들의 목소리만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목자를 알 수 있었다. 특정한 목동의 떼를 나가게 하려면 목동은 자신의 양들을 부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그 목동의 양들만 밖으로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우리들은 보안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의도한 문 이외의 출입구를 사용할 필요도 또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 문은 허락받은 목동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고, 또한 양 떼가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누군가가 담을 타고 우리에 들어가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양을 해치거나 훔치려는 목적이었다.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은 오직 그만이 '인정된' 목자이고, 그의 양들은 그의 목소리로 목자를 알아본다는 것을 설명하실 것입니다. 낯선 사람과 도둑들은 양들이 알아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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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e gatekeeper opens the gate for him, and the sheep listen to his voice. He calls his own sheep by name, and leads them out.
4. Whenever he brings out his own sheep, he goes before them, and the sheep follow him, for they know his voice.
5. They will by no means follow a stranger, but will flee from him; for they don’t know the voice of strangers.”
6. Jesus spoke this parable to them, but they didn’t understand what he was telling them.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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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지기는 목자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을 이름으로 부르며 그들을 밖으로 인도한다. 4. 목자가 자기 양을 밖으로 불러낸 후 양들 앞으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그를 뒤따라간다. 

우리를 지키는 문지기는 인정된 목자들(우리 안에 양 떼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출입할 수 있도록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문지기가 허락한 사람들만 합법적으로 우리로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길이나 담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도둑이나 강도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앞 장의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기적과 말씀을 완강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양 떼와 목자의 비유를 사용하셔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한 개의 우리에 여러 마리의 양 떼를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예수를 비판한 종교 지도자들이 우리 안에 양 떼에 섞여 있지만, 그들은 예수님에게 속한 무리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불러도 그들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셨듯이, 그들은 예수님의 목소리 대신 마귀의 목소리를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비판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아니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그의' 것(소속 및 소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 즉 사탄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속한 사람은 자신의 목동인 하나님을 알아봅니다. 그러나 다른 무리에 속한 양들은 마귀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을 때 반응하지 않습니다.

5. 양들은 낯선 사람을 절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양들이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에게서 도망간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분이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    

자신의 목자가 있는 양들은 다른 목자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에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고 따라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양들은 그에게서 도망갑니다. 예수님이 양과 목자의 비유로 예수를 배척하는 그들 무리가 '그의' 양 떼의 일부가 아님을 설명하셨지만, 듣고자 하지 않는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양과 목자의 비유를 보면, 그 양 우리의 규칙만 따르는 양들과 목자들은 평화로워만 보입니다. 목자가 자신의 양들을 우리에서 부르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문지기는 양 문을 열어주고, 목자의 양들은 우리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양들은 자신의 목자를 뒤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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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Jesus therefore said to them again, “Most certainly, I tell you, I am the sheep’s door.
8. All who came before me are thieves and robbers, but the sheep didn’t listen to them.
9. I am the door. If anyone enters in by me, he will be saved, and will go in and go out, and will find pasture.
10. The thief only comes to steal, kill, and destroy. I came that they may have life, and may have it abundantly. 

선한 목자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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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나는 양의 문이다.  

앞에서 예수님은 그의 사역을 목자의 목소리에 비유하셨습니다. 우리에 있는 양들은 목동의 목소리(자기를 돌보는 목동의 목소리)만 들리면 우리의 안팎으로 이동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을 배척하는 자들은 자신이 '그의' 양 떼의 일부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음을 설명합니다(요 10:1-6). 여기서 시작하는 그의 두 번째 비유는 첫 번째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별도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개의 'I AM(나는)' 진술 중 세 번째 진술을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출 3:14)을 그들에게 상기시킵니다. 앞에서 예수가 아브라함을 언급할 때 그들은 그 말을 신성모독으로 해석하고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요 8:58-59).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가서 누가 그를 보내셨느냐 물으면 어떻게 답해야 하느냐는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여기서 예수님은 별도의 비유를 하시는데, 당시의 양 우리들은 높은 담과 좁은 출입구 하나만 있었다. 그러한 구조로 양들이 밖으로 나가 헤메는 것을 막고, 야생동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양들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이 쉬웠다. 이 좁은 출입구를 문지기 한 명(요 10:3)이 지켜고 있었는데,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문지기들은 대개 문을 열고 누워 쉬거나 잠을 잤다. 그래서 문지기는 말 그대로 양 우리의 '문'이 되었다.

예수님 시대의 양 우리의 구조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이미지 소스: https://concordiaandkoinonia.wordpress.com/ 

'양의 문'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오도록 하는 수단에 예수뿐임을 암시합니다. '문'이신 예수님이 양 우리를 지키고 있고, 안에는 목자들의 다른 양들이 같이 모여있습니다. 밖에서 목동들이 오면 양들은 자신의 목동의 소리를 듣고 그를 따라 나갑니다.  

8. 나보다 앞에 온 사람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들이다. 그러나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9나는 문이니, 나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며, 들어가고 나오며 목초를 찾을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앞의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진정한' 지도자들이 아니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 개념은 최소한 미묘하게는 노아가 지은 방주에 하느님이 놓으신 유일한 문, 즉 인류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창세기 6:16)를 의미한다. 

위의 '양의 문' 비유에 대한 성경학자의 설명에 함축된 뜻이 교훈적입니다. 예수님의 '문'은 인류의 타락으로 내려진 대홍수의 난에서 유일하게 구원받을 수 있는 방주에 놓으신 '하나님의 문'입니다. 세 개의 비유들은 예수가 앞에서 안식일에 맹인을 치유한 이유로 예수를 비판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양 우리의 문지기의 역할은 누군가가 우리에 접근하는 것을 통제하고 양들의 들어가고 나오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잠을 자거나 쉬면서 문지기는 우리의 문을 가로질러 누워 말 그대로 '문'의 역할을 했습니다. 성경학자는 설명합니다(아래): 

이 비유는 여러 단계의 의미를 가져온다. 무엇보다도, 오직 문을 통해서만 양이 '구원될 수' 있다. 이것은 무언가가 안전하게 유지되거나, 치유되거나, 파괴로부터 구조되는 것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sōthēsetai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예수님이 바로 그 영적인 문이자 유일한 문임을 주장하신다.

또한 여기에서 양의 문(이 경우 '예수')은 모든 양을 두 개의 기본 그룹으로 나눈다. 양들은 '안'에 있거나 '밖'에 있다. 즉, 그들은 '구해지거나, 구해지지 않는다'. 다른 범주도 없고 다른 옵션도 없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이든 영원히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신약의 일관된 가르침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또한, 일부 해석자들은 이것을 예수가 유대교에서 사람들을 끌어내서 기독교로 이끄는 언급으로도 본다.

'문'에 대한 해석이 복잡합니다. 어쨋든 '양의 문'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양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를 지키십니다. 이 비유를 적용하면, 종교 지도자들은 (담을 넘어) 양 우리로 몰래 들어가는 도둑과 강도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10.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해서 온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왔다.   

여기서 예수님은 세 번째 비유인 '도둑'에 대한 비유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이미 위선적이고 전통에 얽매인 종교 지도자들을 도둑에 비유했습니다. 스스로 영적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지만, 경건하지 못하고 위선적인 그들은 자신의 교만과 탐욕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만을 줍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이유는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함입니다.

앞에서는 양의 문이신 예수님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도둑이 온 이유는 절도와 살인과 파괴이나,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양을 위해 생명을 유지하는 것 뿐아니라 더 풍부한 생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풍요한 삶'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는 성경학자의 글을 인용합니다(아래): 

'풍요한' 삶은 물질적인 부와 번영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을 말한다(골 3:2–3; 마 6:25–32). 그것은 죄의 형벌을 받는 영원한 고통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풍요로운 삶은 무엇보다도 영원한 삶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요 17:3). 풍성한 삶은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자라는 것(벧후 3:18)이다. 그것은 영혼의 열매로 가득 찬 삶으로 꽃을 피운다는 것(갈 5:22-23)을 의미한다. 거짓 스승과 거짓 종교는 얕고 일시적인 안도감을 주지만, 오직 예수님만이 진정으로 영원한 생명과 영적 풍요를 주신다.

'풍요한 삶'에 대한 위의 성경의 개념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다른 학자들의 설명을 인용합니다(아래):

"그리스어로 '풍요(abundance)'는 뜻의 perissos는 수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잉여(surplus)'를 의미한다. 풍성한 삶은 만족한 삶 위에 있는데... 그 만족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부와 영광에 따라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Boice)

  • 풍요로운 삶은 특별히 긴 삶은 아니다
  • 풍요로운 삶은 쉽고 편안한 삶이 아니다
  • 풍요로운 삶은 예수 안에서 만족과 행복이 가득한 삶이다.

"삶은 정도의 문제이다. 어떤 삶은 살아있지만, 어떤 삶은 죽어가는 양초처럼 깜박이고, 또 꺼져가는 연기의 불길처럼 희미하다. 그러나 어떤 삶은 생명이 넘치고, 밝고 격렬하다" (Spurgeon)

  • 풍요로운 삶은 체력이 있다
  • 풍요로운 삶은 넘치는 에너지가 있다 
  • 풍요로운 삶은 삶의 영역이 넓다
  • 풍요로운 삶은 무언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 풍요로운 삶은 즐거움이 넘쳐난다
  • 풍요로운 삶은 이길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

피상적으로 무병장수와 쉽고 편안한 삶이 풍요로운 삶은 아닌 것을 우리는 압니다. 위의 학자의 말처럼 그것은 '정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어떤 상태)의 삶을 살고 있을까요? 풍전등화(風前燈火)처럼 위태로운 상태에 있지 않을까요? 풍요로운 삶이 구체적이고 무엇이고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삶은 '정도의 문제'이다. 어떤 삶은 꺼져가는 연기의 불길처럼 희미하다. 그러나
어떤 삶은 생명이 넘치고, 밝고 격렬하다!

 

 

11.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lays down his life for the sheep.
12. He who is a hired hand, and not a shepherd, who doesn’t own the sheep, sees the wolf coming, leaves the sheep, and flees. The wolf snatches the sheep, and scatters them.
13. The hired hand flees because he is a hired hand, and doesn’t care for the sheep.
14. I am the good shepherd. I know my own, and I’m known by my own;
15. even as the Father knows me, and I know the Father. I lay down my life for the sheep.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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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암시하는 'I AM' 진술을 상기시키는 일곱 가지 사례 중 네 번째로, 이 진술은 7절과 9절에서 하신 'I am' 진술과 별개의 진술이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주장하신다. 

다윗의 경험은 고대 세계에서 목동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삼상 17:34–37). 야곱이 분투는 양 떼를 지키는 일이 쉽지 않았음을 증명한다(창세기 31:38-40). 양치기들은 양 떼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감시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늑대나 곰 같은 동물들과 도둑들로부터 양떼를 지켜야 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다시 자신을 이기적이고 경건하지 못한 종교 지도자들과 대조한다. 그들은 자신을 이익을 위해서 도둑처럼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하고 양떼들을 교란시킨다. 그러나 예수님은 양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 풍족하게 하신다(요 10:10). 종교 지도자들과 비교하며 예수님은 자신을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선한 목자'라고 스스로 부르신다. 반면 예수를 비판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스스로 섬긴다고 자처하면서, 사람들을 돌볼 의지도 없고 돌보지 못하는 '악한' 목자였다. 동시에 예수님은 자신의 지상의 사역이 그의 양들을 대신하여 죽는 것이라는 생각을 암시하신다.

12. 품삯을 받고 일하는 사람은 목자가 아니고 양들도 자기 양이 아니다. 그 사람은 늑대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남기고 멀리 달아난다. 늑대가 양을 공격하고 양떼는 흩어져버린다. 

여기서 예수님은 문자적인 의미에서는 양떼를 섬기지만, 사랑과 자기희생의 동기가 부여되지 않은 사람들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고용된 목동은 양이 심각한 위협을 받을 때 도망친다. 그들은 양이 그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양을 돌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적인 속임수를 사용하여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묘사한다. 이는 또한 그 지위가 수반하는 봉사와 희생 없이 영적 권위와 특권을 주장하여, '수동적으로'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13. 그 사람은 품삯을 받고 일하기 때문에, 양들을 돌보지 않는다. 14.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는다.

이 비유를 보면 세 가지 유형의 목동들이 보입니다. 첫째는 도둑과 강도의 탈을 쓴 거짓 종교 지도자들과 같은 목동, 둘째는 자신의 목숨도 내놓는 예수님과 같은 '선한 목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용된 일꾼과 같은 목동입니다. 고용된 일꾼들은 일정 수준의 보살핌은 제공하지만 개인적인 손실이나 위험에 직면하면 도망칩니다(요 10:12). 이들은 실제로 양들을 위해서 양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양들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양은 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자신은 선한 목자임을 강조하십니다. 자신의 양들이 필요한 것을 알고 양들도 목자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양들을 안전과 건강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내놓습니다. 예수님과 양들과의 친민함은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 사이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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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I have other sheep, which are not of this fold. I must bring them also, and they will hear my voice. They will become one flock with one shepherd.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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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나에게는 이 우리에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와 같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문'이라고 주장하셨는데, 이는 오직 그만이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통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그의' 무리에 속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현재의 양들이 아닌 '다른 양들'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은 그 양들도 데려와서 한 목자 아래 하나로 합치려고 하십니다. 이 의미는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어, 한 목자 즉 예수님과 영원히 같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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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Therefore the Father loves me, because I lay down my life, that I may take it again.
18. No one takes it away from me, but I lay it down by myself. I have power to lay it down, and I have power to take it again. I received this commandment from my Father.”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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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나는 그 목숨을 다시 얻을 것이다.  

성경학자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주장은 청중에게 논란이 된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인류의 유일한 합법적인 구원수단'(요 10:1-13)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방인을 의미하는 '다른 양들'(요 10:14-16)을 하나님과의 이런 친밀한 관계로 끌어들일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한 발언 자체는 예수를 비평하는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다시 임박한 죽음을 언급하신다. 이것은 그의 제자들(마 8:31-33)에게도 주장하셨다. 예수님은 앞서 묘사한 '선한 목자'(요 10:10-14)처럼 자신의 영적 '양들'를 위해 죽을 각오가 있음을 이미 암시하셨다. 이 진술은 더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특별히 예수님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정말로 죽을 것이고, 죽음에서 부활할 것을 예언한다.

어떤 의미에서, 듣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진술이 단지 가정일 것으로 추측했을 수도 있다. 즉, 예수님이 '의지로 죽을 것(willing to die)'이 아니라 그저 '죽을 것(would die)'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의 가장 가까운 추종자들도 받아들이기를 매우 힘들어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광란의 미치광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충격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곧 죽음에서 살아날 하나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선한 목자'의 유일한 본보기라고 주장한다. 일부의 사람들은 예수의 기적적인 표적을 보면, 그가 미쳤거나 마귀에 걸렸다고 믿기가 매우 힘들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는 자가 없고 내가 나의 목숨을 스스로 내놓기 때문이다. 나는 내놓을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나는 이 계명을 나의 아버지에게서 받았다."

예수님은 말씀을 계속하시면서 '선한 목자'(요 10:10-14)와 '문'(요 10:7-9)으로서 자신의 역할이 실제 죽음뿐만 아니라 부활도 포함한다고 분명히 하신다. 그 죽음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지 예수가 강요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권능과 권위를 바탕으로 부활을 가져올 것이다(요 2:19-21). 이 비교적 짧은 진술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과 같이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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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Therefore a division arose again among the Jews because of these words.
20. Many of them said, “He has a demon, and is insane! Why do you listen to him?”
21. Others said, “These are not the sayings of one possessed by a demon. It isn’t possible for a demon to open the eyes of the blind, is it?”

19.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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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 말씀으로 인해 유대인들 중에 다시 편이 갈리게 되었다. 20. 그들 중 많은 사람이 "그가 귀신에 들려서 미쳤다! 왜 그 사람의 말을 듣느냐?"라고 말했다. 21. 어떤 사람들을 말했다. "이 말은 귀신들린 사람의 말이 아니다.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느냐?"

예수님은 자신이 '문'이며 구원으로 가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앞에서도 그랬듯이, 이를 들은 사람들은 두 편으로 갈립니다. 이 논쟁은 앞에서 예수님이 세 가지의 목자에 대한 비유를 하신 직후에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합법적인 전령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반응은 그들 자신의 영적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려는 자들은 에 응답할 것이고(요 7:17), 어떤 일이 있어도 거부하려 하는 자들은 그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요 5:39-40). 기적과 진실한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을 받아들이게 해야 하지만, 굳은 마음은 언제나 핑계의 구실을 찾을 것입니다.

이 논쟁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설명은 성경 기록이 없고, 다음 이야기는 예루살렘의 다른 축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0:9, https://scpeanutgallery.com/)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해서 온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왔다. (요 10:10)

 

BIBLIOGRAPHY
https://enduringword.com/bible-commentary/john-10/
https://www.bibleref.com/John/10/John-chapter-10.html

개역개정 아래의 볼드체 성경구절은 WEB영어성경에 기반한 저의 개인 번역입니다 (따라서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구절 위 코멘트 중 존칭어(검정색)의 텍스트는 저의 개인 멘트이고, 반어체(옅은 청색 텍스트)는 인용, 번역 및 수정문구입니다.
인용 중 재인용은 이텔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예: 성경, 외국 학자설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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