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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성경묵상

히브리서(Hebrews)9:11-22(단번에 모두를 위하여)

by 미류맘 2022.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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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장막을 통해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는 죽으심으로 단번에 모두를 위하여 영원한 속죄가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유언을 한 사람이 죽지 않으면 유서가 효력이 없듯이, 예수님의 언약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속죄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11. But Christ having come as a high priest of the coming good things, through the greater and more perfect tabernacle, not made with hands, that is to say, not of this creation,
12. nor yet through the blood of goats and calves, but through his own blood, entered in once for all into the Holy Place, having obtained eternal redemption.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11-12. 단번에 모두를 위하여

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앞으로 다가올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며, 창조된 이 세상에 속한 것도 아닌, 더 크고 더 온전한 장막을 통해서 오셨습니다.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속죄를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앞으로 다가올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11a절).  “Having come”은 현재완료형으로 이미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셨음을 저자는 증언합니다.  

"더 크고 더 온전한 장막을 통해서" (11b절). 장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 사십 년 동안 그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녔다. 장막은 이스라엘 자손이 날마다 제물을 바치는 곳이었다. 그들은 장막, 특히 지성소를 하나님의 거처라고 이해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에 정착한 이후 장막의 뒤를 이어 성전이 건설되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가 우리의 대제사장이고, 그분이 섬기는 성소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주께서 세우신 참 성막"(히 8:2)이라고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그는 또한 광야에 모세가 세운 장막은 "하늘에 있는 성막의 모형과 그림자"(히 8:5)에 불과하다고 언급한다.

이제 저자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다니던 장막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더 온전한 장막"은 "이 세상의 창조물"이 아니라고 언급한다. 즉,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 (12a절). 옛 광야의 장막과 그리스도의 온전한 장막을 비교하고, 저자는 이어 '염소와 송아지의 피'와 그리스도의 '자신의 피'를 대비시킨다. 그리스도의 피는 두 가지 면에서 우월하다:

  • 첫째, 그리스도의 피는 성막에 접근을 허용한다. 성막은 두 개의 방, 성소와 지성소(가장 성스러운 장소)로 구성되었다. 성소는 일반 제사장들에게 개방되어 있었으며, 하나님의 거처인 지성소로부터 휘장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솔로몬이 첫 번째 성전을 지었을 때, 성전이 성막을 대신하는 하나님의 거처가 되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 그리스도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열려 있음을 상징했다(마 27:51;막 15:38).

  • 둘째,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상의 성막에서 하는 일은 매년 반복되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가능하게 하셨다. 

"자기의 피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속죄를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12b절).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일년에 한 번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의 일은 일시적이었고 매년 반복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지성소로 단번에 들어가셨다. 십자가 위에서의 그의 일은 반복될 필요가 없다.

구원은 보통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포로로 잡힌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포함된다. 레위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노예로 팔아야 했던 가족을 다시 사도록(구원하도록) 요구하였다(레 25:47-49). 또한 가난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가족 땅을 다시 사도록 요구하였다(레 25:25, 33). 신약성서에서는 십자가에서 예수의 죽음을 인류에 대한 구원적 행위인 "많은 사람을 위한 몸값"(막 10:45)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롬 3:24)을 말한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는 그의 은혜의 풍성함에 따라 그의 피를 통해 구원, 곧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말하고(엡 1:7),"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속죄, 곧 죄 사함을 얻었다"라고 말한다 (골 1:14).


13. For if the blood of goats and bulls, and the ashes of a heifer sprinkling those who have been defiled, sanctify to the cleanness of the flesh:
14. how much more will the blood of Christ, who through the eternal Spirit offered himself without blemish to God, cleanse your conscience from dead works to serve the living God?
15. And for this reason He is the Mediator of the new covenant, by means of death, for the redemption of the transgressions under the first covenant, that those who are called may receive the promise of the eternal inheritance.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9:13-15. 그리스도 피의 놀라운 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사람들을 뿌려, 그 육체를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게 할 수 있다면, 14. 영원한 성령을 통해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어떻겠습니까? 그의 피는 죽음에 이르는 행동에서 여러분의 양심을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데 얼마나 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15.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재자이십니다. 이는 첫 언약 아래에서 범한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영원한 상속의 약속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사람들을 뿌려, 그 육체를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게 할 수 있다면" (13절). 이 구절은 성막과 성전의 전형적인 희생제물이었던 '염소와 황소의 피''그리스도의 피'를 비교한다.  

영원한 성령을 통해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어떻겠습니까? 그의 피는 죽음에 이르는 행동에서 여러분의 양심을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데 얼마나 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14절). '그리스도의 피'는 부정한 사람들에게 의식적인 깨끗함을 제공했던 '염소와 황소의 피'보다 우월하다. 성막이나 성전에서의 희생제물이 죄인을 깨끗하게 했지만, 그 깨끗함의 효과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이었다. 그것은 정기적으로 반복되어야 했고, 지성소로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희생제물인 동물들이 흠이 없어야 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흠이 없고, 그리고 죄가 없는 사람이었다. 차이점이 있었다. 예수는 자신을 자발적인 제물로 바쳤는데, 이는 희생제물로 바친 동물들은 그렇지 않았다. 또한 예수님의 희생은 '죽음에 이르는 행동에서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우리의 손상된 양심마저 회복시키기에 충분하다.

죽음에 이르는 행동에서 여러분의 양심을 깨끗하게: 영어성경으로 'dead works'는 직역하면 '죽은 행동'입니다. 풀이하면 '죽음에 이르는 행동'은 우리 인간의 죄악을 말할 것입니다. 한 학자는 '죽음에 이르는 행동'에는 옛 언약에 따라 지속되었던 희생제사와 낙담한 유대 기독교인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유혹을 받았던 것도 그러한 행동에 포함된다고 말합니다. 학자는 우리의 온전하지 않은 양심(conscience)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훌륭한 도구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하지는 않다. 우리의 양심은 타들어갈 수 있다(딤전 4:2). 우리의 양심은 더러워 수 있다(디 1:15). 우리의 양심은 사악할 수 있다(히 10:22).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재자이십니다" (15a절). 예수님의 중재자로서의 일은 그의 죽음에서 근본적으로 성취된다. 그의 천상의 중재의 사역은 그 완벽한 희생을 돌아보게 한다.

"첫 언약 아래에서 범한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15b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첫 언약 아래에서 죄를 범한 사람들을 속죄하셨다. 십자가에 못박아 죽으신 것이 첫 번째 언약 아래서 받은 사람들을 속죄하는 일이었다. 모세의 명령 아래 믿음으로 행해진 죄에 대한 모든 희생은 십자가에서 전액 지불된 차용증(IOU)이었다.


16. For where there is a testament, there must also of necessity be the death of the testator.
17. For a testament is in force after men are dead, since it has no power at all while the testator lives.
18. Therefore not even the first covenant was dedicated without blood.
19. For when Moses had spoken every precept to all the people according to the law, he took the blood of calves and goats, with water, scarlet wool, and hyssop, and sprinkled both the book itself and all the people, saying,
20. “This is the blood of the covenant which God has commanded you.”
21. Then likewise he sprinkled with blood both the tabernacle and all the vessels of the ministry.
22. And according to the law almost all things are purified with blood, and without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remission.

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9:16-22. 예수님 죽음의 필요성

16. 유서가 있는 곳에는 유언자의 죽음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17. 유언은 유언한 사람이 죽은 후에만 효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18. 그러므로 첫 번째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19. 모세는 율법에 따라 모든 백성에게 모든 계명을 선포했을 때, 송아지와 염소를 피와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가져다가 율법책과 백성들에게 뿌렸습니다. 20.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명령하신 언약의 피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1. 그리고 성막과 예배에 쓰이는 모든 그릇에도 피를 뿌렸습니다. 22.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지고, 피를 흘리지 않고는 용서받음이 없습니다.

"유서가 있는 곳에는 유언자의 죽음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16절). 저저는 예수님의 죽으셔야 했던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유언은 유언을 한 사람이 죽은 후에만 효력이 있기 때문에(17절), 예수님의 '진술(언약)'이 효력이 있으려면 죽어야만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언약'에 대해 학자는 설명합니다:

"그리스어에서 같은 단어가 '언약'과 '진술'에 사용된다. 이중 사용이 어렵지만 15절에서는 '언약'을 의미하고, 16절과 17절에서는 '진술'을 의미하고, 18절에서는 다시 '언약'을 의미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Thomas)

"사람이 살아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면, 그 사람의 재산을 관리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유언자가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으면, 그 유언은 유효하다. 복된 복음도 마찬가지다. 예수가 죽지 않았다면 복음은 아무 가치 없고 효력이 없다." (Spurgeon)

"그러므로 첫 번째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18절). 그러므로 첫 번째 언약조차도 피 없이 바쳐지지 않았다. 분명히, '옛 언약'은 죽음이 필요했다. 사실상 모세의 율법 아래 희생제사의 모든 절차는 어떤 식으로든 피에 의해 이루어졌다.

"피를 흘리지 않고는 용서받음이 없습니다" (22절). 이것은 하느님의 인간과의 거래하는 기본 원칙이다. 현대인들은 죄는 시간, 우리의 선행, 우리의 경건한 삶, 또는 단순히 죽음에 의해 용서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피를 흘리지 않고서는 용서가 없으며, 완벽한 희생 없이는 완벽한 용서받음이 없다.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지고, 피를 흘리지 않고는 용서받음이 없습니다. (히 9:22, 이미지 소스: tps://redeeminggod.com/)

 예수의 피를 흘리는 것은 인간의 죄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스퍼전은 자신의 설교 "피 흘리심"에서 우리에게 세 명의 바보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첫 번째는 싸움터에서 부상당한 병사이다. 의무병이 군인에게 왔고, 그 병사는 바로 총과 자신을 쏜 군인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두 번째 바보는 선장인데, 그의 배는 끔찍한 폭풍으로 곧 침몰할 것이다. 선장은 배의 핸들에 있지 않고, 폭풍우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내려고 그의 방에서 차트를 연구하고 있다. 셋째 바보는 죄로 병들어 죽으면서도 하나님의 정의의 물결 속으로 들어가려고 악의 근원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문제보다 해결책을 더 많이 보아야 한다. (스퍼전 설교에서 인용)

위의 스퍼전의 설교에서 나오는 세 명의 바보는 얼핏 보면 현명해 보일 수 있습니다 (죽음을 코 앞에 두고도 이럴 수 있나?). 그러나 그들의 목숨은 이미 죽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그들이 죽기 전에 해야 하는 것은 문제를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책를 보아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죽는 것이 결정된 순간 우리는 세상 일을 걱정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붙잡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또 살고 일어나서 "또 하루 살았네. 어제도 그제와 다름 없었는데 오늘도 그럴거야... 그러면 안되는데..."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죽을힘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의 피를 생각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새로운 내일을 설계해야 합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언약(covenant)' 유언과 같이 생각하면서 진술을 펴 나갑니다. 언약은 쌍방간의 약속의 성격이고 유언은 죽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남기는 진술의 성격입니다. 예수님의 언약(죄의 용서)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예수님은 죽어야 했고 육적인 몸의 피 흘림이 없이는 죄의 용서가 있을 수 없다고 진술합니다. 예수님의 새 언약은 쌍방의 합의가 필요 없습니다. 제안은 예수님이 하셨고, 우리는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예, 아니오!"

요즘 제 딸하고 카톡으로 자주 사용하는 이모티콘이 있는데 '네니요'란 것은 자주 사용합니다. 이런 태도가 우리의 애매모호한 심적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이런 답변은 없습니다.

네니요!

BIBLIOGRAPHY:
https://sermonwriter.com/biblical-commentary-old/hebrews-911-14/

h
ttps://enduringword.com/bible-commentary/hebrews-9/
볼드체의 영문 번역은 WEB 영어성경에 기반한 저의 개인 번역입니다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구절 위 코멘트 중 존칭어의 텍스트는 저의 개인 멘트이고, 청색 텍스트의 반어체는 인용, 번역 및 수정 문구입니다.

인용 중 재인용은 이텔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예: 성경, 외국 학자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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