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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성경묵상

히브리서(Hebrews)12:1-13(믿음의 경주를 달립시다!)

by 미류맘 2022.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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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영웅들을 소개한 후 저자는 무거운 것과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함으로 우리 앞의 경주를 달리자고 초대합니다. 예수만을 바라보고 예수를 생각하고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징벌을 감사히 받고, 격려를 받고 강해지라고 권면합니다.

 

1. Therefore we also, since we are surrounded by so great a cloud of witnesses, let us lay aside every weight, and the sin which so easily ensnares us, and let us run with endurance the race that is set before us,

주께서 주시는 징계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브리서 12:1. 우리 앞의 경주를 달립시다!

1. 그러므로 구름처럼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우리를 쉽게 함정에 빠뜨리는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함으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립시다.

그러므로 구름처럼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히브리서 저자는 앞에서 소개한 18개 이상의 일련의 믿음의 영웅들을 하늘에서 온 관중 (구름처럼 많은 증인)으로 그리면서 대회에 참여하는 달리기 선수가 된 우리를 응원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무게에서 벗어나서 현재의 낙담을 극복하기를 응원합니다. 

과거의 믿음의 영웅들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하늘에서 관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는 이 광경은 흥미롭기는 한데 입증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그들이 과거의 증인이 되기 때문에 저자는 우리에게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라'권면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무거운 것과... 죄를 벗어버리고: 경주를 위해 우리에게 장애물이 될 수 있는 우리를 짓누르는 온갖 무거운 것과 죄를 벗어버리라고 저자는 권면합니다. 달리기 선수가 몸을 가장 가볍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과 착용하는 옷과 신발에 모든 과학을 집중하듯 우리도 효율적인 경주를 위해 방해가 되는 모든 장애물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학자는 질문합니다:

"우리의 선택은 항상 옳고 그름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방해할 수도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사이에 있다. 당신의 삶에 당신이 벗어버려야 하는 삶의 무게가 있나요?"

모든 무거운 것과 우리를 쉽게 함정에 빠뜨리는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함으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립시다. (히 12:1, 이미지 소스: https://www.biblestudytools.com/)

인내함으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립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한 우리 앞에 놓은 경주를 끝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심입니다. 마지막 구절은 명령형(달리라: Run)이 아닌 청유형(달립시다: Let us run)입니다. 스퍼전은 말합니다.

"그는 출발점에서 우리와 함께 서서 우리에게 '달리라' 하지 않고 '달립시다'라고 간곡히 말한다. 사도 자신이 주자로서 우리 편에 서 있다." (Spurgeon)

달리기 선수가 출발점에 서 있을 때, 그는 달릴 것인가 달리지 않을 것인가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입니다: "어떻게, 얼마나 빨리 달릴 것인가?" 우리는 경주를 시작하기 위해 출발점에 서 있고 우리의 목표는 '성공적인 달리기'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심입니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필요한 것은 즐거움입니다. 우리는 삶이라는 마라톤에서 '기쁜 마음으로 인내하며 달리는 주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경주(race)'로 번역된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 agona인데, 여러 종류의 갈등이나 투쟁에 사용되는 단어이고, 사도 바울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경주로 비유되는 삶 자체가 갈등과 투쟁의 연속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2. Looking unto Jesus, the author and finisher of our faith, who for the joy that was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despising the shame, and has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2. 예수를 바라봅시다!

2. 우리 믿음의 시작이며 완성하시는 예수를 바라봅시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십자가를 견디시고, 하나님 보좌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시작이며 완성하시는 예수를 바라봅시다. (히 12:2, 이미지 소스: https://open.life.church/)

예수를 바라봅시다: NASV 영어성경은 이것을 아름답게 번역한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에게 고정시킵시다".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시선을 그에게 고정하고 우리는 경주만 달리면 된다. 그는 우리의 초점이고, 우리의 영감이며, 우리의 본보기이다.

"'바라보며(looking)'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우리가 영어에서 찾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한 단어이다. 그것에는 시선을 다른 모든 것에서 멀어지게 하는 전치사가 있다. 당신은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구름처럼 많은 증인들에게 시선을 주지 말라. 그들이 당신의 눈을 예수에게서 빼앗으면 그들이 당신을 방해할 것이다. 무거운 짐과 큰 죄악을 생각하지 말아라. 그것들을 멀리하라. 경주 코스도 경쟁자도 바라보지 말고, 예수만을 바라보면서 경주를 시작하라." (Spurgeon)

우리 믿음의 시작이며 완성하시는 예수: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저자(author) 일뿐만 아니라, 믿음의 마무리자(finisher)이기도 하다.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것" (빌 1:6)이라는 생각이 낙담한 기독교인들에게 진정한 위안이 되었다. 

우리 믿음의 시작이며 완성하시는 예수를 바라봅시다. (히 12:2)

예수님이 출발선, 결승선뿐 아니라 우리가 달리는 모든 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예수만을 바라보고 (시선을 고정하고) 달리라고 저자는 권면합니다. 그분이 우리 믿음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시고: 예수께서는 십자가 그 자체를 기쁨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의 공포를 지나쳐 그 너머의 기쁨을 즐길 수 있었다. 같은 사고방식은 이 유대 기독교인들(그리고 우리 자신)이 견딜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십자가 고문의 가장 두드러진 요소 중 하나는 극심한 수치심이었다. 예수님은 그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 

수치심은 중요한 시련이다. 성경은 수치심이 지옥의 공포의 한 면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땅의 먼지 속에서 자는 많은 사람들이 깨어날 것이다. 어떤 이는 영원한 삶으로, 어떤 이는 수치심과 영원한 부끄러움을 받을 것이다." (단 12:2)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이 지옥 같은 부끄러움을 감수하셨다.

  • 예수는 모독이라는 수치스러운 비난을 받았다.
  • 예수는 수치스러운 조롱을 받았다.
  • 예수는 수치스러운 매질을 당했다.
  • 예수는 수치스러운 왕관을 썼다.
  • 예수는 수치스러운 옷을 입었다.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기도하시면서도 수치스러운 조롱을 참으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다. 그들은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참는 것을 제외하면 예수님을 위해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스펄전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서 세상에서 받는 수치심을 참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대담하게 말했다. "그래, 넌 겁쟁이야. 만약 누군가가 당신을 그렇게 부른다면 당신은 얼굴이 빨개질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당신은 다른 주제에 관해서는 겁쟁이가 아닐 것이다. 다른 모든 일에는 대담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비겁하다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당신은 세상을 향해서는 용감하고 그리스도를 향해서는 비겁하다!" (Spurgeon)

그런 수치심을 견디신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이 본문과는 다른 맥락이겠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때로 이상한 기독교인들의 이해 못하는 (정말로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인해 스스로가 기독교인임을 부끄럽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생각치 않고 우리는 예수님만 바라보면 그런 이상한 시선의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3. For consider Him who endured such hostility from sinners against Himself, lest you become weary and discouraged in your souls.
4. You have not yet resisted to bloodshed, striving against sin.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히브리서 12:3-4. 예수를 생각하라!

3. 죄인들이 이같이 자신에게 적대한 것을 참으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이 피곤하고 낙심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죄와 싸우면서 아직 피 흘리기까지 저항하지는 않았습니다.

죄인들이 이같이 자신에게 적대한 것을 참으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예수님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낙담하지 않고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입이다. 바울이 쓴 대로, "우리가 진정으로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다." (롬 8:17)

  • 예수께서 죄인들에게서 받은 모든 적대감을 생각해 보십시오: 
    • 나사렛에 있는 그의 회당에서 그들은 그를 죽이기를 원했다.
    • 종교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그를 함정에 빠뜨리고 난처하게 하려고 했다.
    • 그들은 예수를 술꾼이자 식탐꾼이라고 말하면서 거짓말을 했다.
    • 그는 제자 중 한 명에게 배신당했다.
    •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롱과 구타를 당했다.
    • 그의 백성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고 부르짖었다.

예수가 우리에게 그 자신이 겪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과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을 그가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을 알면, 여러분의 영혼이 피곤하고 낙심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와 싸우면서 아직 피흘리기까지 저항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유대 기독교인들은 (아직 피를 흘리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사회적, 경제적 박해를 경험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매우 낙담했다.

세상을 살면서 어렵고 낙심하는 일이 생길 때,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문해야 하겠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아무리 힘들어도 온갖 조롱과 핍박을 받으시고,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겼으신 고통만 하겠는가?"


5. And you have forgotten the exhortation which speaks to you as to sons:

“My son, do not despise the chastening of the LORD,
Nor be discouraged when you are rebuked by Him;
For whom the LORD loves He chastens,
And scourges every son whom He receives.”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히브리서 12:5-6. 주님의 징계를 감사하라!

5.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하듯 여러분에게 하신 격려의 말씀을 잊었습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주님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마라. 6. 주님은 그가 사랑하는 자를 벌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모든 아들을 채찍질하신다."

여러분은... 잊었습니다: 이 유대 기독교인들이 낙심하는 한 가지 큰 이유는 하나님이 고난의 시기를 허락하실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의 징벌에 관한 원칙을 잊어버렸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악, 재앙, 고난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든 세상의 선과 악에 우리는 노출되어 있습니다. 유독 나에게만 그런 나쁜 일(주님의 징계와 꾸지람)이 있다고 우리는 낙심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주님의 그러한 징계와 꾸지람이 우리를 그의 자식처럼 대한다는 사랑의 표시임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주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훈육은 주님의 사랑하는 교정 도구이며 우리는 그것을 감사히 받아야 한다. 훈육은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달려야 하는 경주에 필요한 훈련이다 (히 12:1-2).

우리가 자녀을 키우면서 훈육을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소위 '사랑의 매'라고 합니다. 아이가 잘못을 했는데 교정을 하지 않는다면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훈육이 따르듯, 주님은 그가 사랑하는 자를 벌하십니다. 


7. If you endure chastening, God deals with you as with sons; for what son is there whom a father does not chasten?
8. But if you are without chastening, of which all have become partakers, then you are illegitimate and not sons.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2:7-8. 징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시

7. 여러분이 벌을 받는 것을 참으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아들처럼 대하십니다. 아버지가 벌을 주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8. 징계는 모든 자녀가 받는 것이고, 만일 여러분이 벌을 받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사생아이며 친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아들처럼 대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와 같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자녀에게 벌을 주지 않는 부모가 없듯이, 징계는 주님의 자녀 된 모든 신자들이 받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벌도 징계도 훈육도 없습니다. 자녀 된 우리가 벌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친자녀가 아닌 사생아일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무관심은 분노를 일으킵니다. 학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교정은 우리를 벌하거나 우리의 죄를 갚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번에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서 행해졌다. 그의 교정은 오직 그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지, 그의 정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화를 내지 않고 우리를 꾸짖으신다."


9. Furthermore, we have had human fathers who corrected us, and we paid them respect. Shall we not much more readily be in subjection to the Father of spirits and live?
10. For they indeed for a few days chastened us as seemed best to them, but He for our profit, that we may be partakers of His holiness.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히브리서 12:9-10. 육신의 아버지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징벌

9. 더군다나 우리에게도 육신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 아버지가 우리를 훈계하여도 우리는 그를 공경합니다. 하물며 영혼의 아버지에게 더욱 복종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10. 그들은 잠시 동안 자신에게 좋다고 보이는 대로 우리를 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저자는 육신(지상)의 아버지가 우리를 훈계하여도 아버지를 공경하는데, 그 아버지가 영혼(천상)의 아버지라면 어떠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하물며 영혼의 아버지에게 더욱 복종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어버지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자식에게 주는 처벌도 불완전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좋다고 보이는 대로 벌하기 때문에). 그러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완전한 하나님은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지상의 아버지보다 더 좋고 영속적인 처벌의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슬픈 것은 하나님과 신자인 우리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벌도 진노도 없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무관심은 분노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11. Now no chastening seems to be joyful for the present, but painful; nevertheless, afterward it yields the peaceable fruit of righteousness to those who have been trained by it.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브리서 12:11. 징계의 과정보다 결과를 보라!

11. 벌을 받는 것이 그때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징계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후에 의로움과 평안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벌을 받는 것이 그때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시련은 시련이고 징벌은 징벌이다. 만약 그것이 우리를 다치게 하거나 압박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시련이 아닌 시련과 징벌이 아닌 징벌을 원한다.

"만일 고난이 즐거워 보인다면, 그것이 징벌이 될까요? 제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많이 혼내 주었는데, 아이가 웃으면서 - 미소 지으면서 - 매를 맞는 것 즐거워하면서 계단을 내려왔다면, 그건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닐까요? 그 처벌은 도움이 되기는 커녕 완전히 쓸모없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처벌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물론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Spurgeon)

저자는 벌을 받는 것을 운동선수의 '훈련'으로 묘사합니다. 훈련은 즐거움이 아닌 고통을 수반하고, 그런 훈육의 결과는 의로움과 평안의 열매입니다. 학자는 말합니다:

이 열매는 기독교인의 삶에 분명히 나타나야 한다. 인생에서 많은 사람들이 위기를 계속해서 겪는 이유는 하나님의 징벌을 보지 못하거나 그것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벌로 인해 훈련되지 않았고, 따라서 의로움과 평안의 열매는 명백하지 않다.

하나님은 당신을 훈련시키는 목적이 있습니다. 다윗이 양을 돌보는 소년이었을 때, 사자를 공격한 다윗을 생각해 보세요. 그는 쉽게 절망하여 하나님께 물었을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을까? 나는 간신히 탈출했다!" 만약 다윗이 앞날을 미리 볼 수 있었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골리앗이라는 거인을 준비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그 사자와의 싸움은 하나님께서 그를 미리 준비시켜 놓으신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목적이 있으십니다. 우리는 그를 신뢰할 수 있고 신뢰해야 합니다.

위의 학자가 양치기 소년이었을 때 다윗의 사자와의 대결 경험을 예로 들었듯이, 다윗은 아직 소년이었을 때 골리앗이라는 거인과 역사적인 대결을 했습니다. 이전의 사자와의 싸움의 경험이 아직 어린 다윗이 골리앗과 대결할 자신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어린 다윗이 목숨을 걸고 사자와 싸워야 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을 수 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까?" 그러나 다윗은 그 과정을 통해 나중에 결과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하나님이 다윗을 훈련시키시는 준비단계였습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넘어서 결과를 보아야 합니다. 
징계는 '후에' 의로움과 평안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결과는 바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의로움과 평안의 열매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깊은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고난을 겪어서 이익을 얻었다고 단번에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 여러분은 자신이 일주일 전에 심은 나무에서 사과나 자두를 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만이 꽃밭에 씨앗을 뿌리고 그 씨앗이 한 시간 안에 식물로 자라기를 기대합니다." (Spurgeon)

우리는 징계에 대한 이 장에서 저자가 예수를 예로 든 적이 없다는 것을 알수 있다.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교정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고통을 겪었지만 교정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12. Therefore strengthen the hands which hang down, and the feeble knees,
13. and make straight paths for your feet, so that what is lame may not be dislocated, but rather be healed.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브리서 12:12-13. 격려를 받고 강하라!

12. 그러므로 힘없이 늘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을 강하게 하고, 13. 여러분의 발을 위해 곧은길을 만들어, 절뚝거리는 다리가 뒤틀리지 않고 오히려 고침을 받게 하십시오. 

그러므로 힘없이 늘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을 강하게 하고: 운동감독이나 군 장교처럼 저자는 예수님의 동료 추종자들에게 용기를 가지고 움직이라고 말한다. 그는 주 안에서 강해지고 낙담에서 벗어나야 하는 철저한 이유를 제시했는데, 이제 그 일을 할 때가 온 것이다. 

오히려 고침을 받게 하십시오: 히브리서 저자는 낙심한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이제 일할 때라고 권면합니다. 일하고 움직이기 위해서는 신체와 정신의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힘없이 늘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과 절뚝거리는 다리를 강하게 해서 강해진 손과 무릎과 다리로 예수와 그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움직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독자들과 우리를 초청합니다. 그리고 나아갈 길을 곧게 하라고 말합니다. 

 

BIBLIOGRAPHY:
https://enduringword.com/bible-commentary/hebrews-12/
볼드체의 영문 번역은 WEB 영어성경에 기반한 저의 개인 번역입니다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구절 위 코멘트 중 존칭어의 텍스트는 저의 개인 멘트이고, 청색 텍스트의 반어체는 인용, 번역 및 수정 문구입니다.

인용 중 재인용은 이텔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예: 성경, 외국 학자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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