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자는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우매한 자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고, 지혜자의 질책이 우매한 자의 웃음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형통한 날과 재앙의 날 모두를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은 앞 일을 알지 못한다고 경고합니다.
전도서 7:1-4. 초상집과 잔칫집
좋은 이름이 값진 향유보다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낫다 (1절): 앞에서 전도자는 영원이 없는 이 세상에서의 무의미하고 행복하지 않은 삶과 저 너머의 세상의 불확실함에 마음의 좌절을 느꼈습니다. 그 생각의 연속선에서 이 결론에 도달합니다. 1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학자의 말로 시작합니다:
- 아기의 탄생에 대한 모든 희망과 잠재성에도 불구하고, 태어나는 날조차 불길하다. 아이들은 인간의 소리인 비명을 지르며 세상에 나온다. "아이가 말하기 전에, 그는 그 자신의 눈물로, 그의 뒤에 오는 슬픔을 예언한다." (Trapp)
- 신약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낫다"는 전도자의 절규에서 우리는 감정이 교차함을 느낀다. 한편으로, 죽는 날은 신자들에게 영광이다. 우리의 전투는 끝났고, 슬픔은 끝났으며, 불확실성은 끝났으며, 모든 것은 새로운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지상의 생명으로 우리에게 주신 의미에 우리는 기뻐한다.
위의 학자는 말하면서 사도 바울의 말에 동의합니다. 바울은 사는 것과 죽는 것 사이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빌 1:23). 그러나 바울은 계속합니다. "내가 남아서 믿음 안에서 여러분과 동참하고 기쁨을 계속해야 하는 것을 확신합니다." (빌 1:24)
우리도 죽음과 삶의 사이에 끼여서 끝없는 욕망의 바다 위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이 두 개의 실체 사이에서 두 발을 딛고 서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현실은 삶에 있지만, 우리의 미래는 죽음으로 가고 있습니다. 죽음은 사망이고, 사는 것은 죽도록 투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죽음(사망; death)과 죽는 것(dying)에, 그리고 1절에 대해 학자는 말합니다:
- "죽음은 죽는 것의 끝이다. 신자가 죽는 날에는 죽는 것은 영원히 끝난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성도들은 더 이상 죽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씨름이고, 몸부림치고, 죽음은 갈등의 끝이다. 그것은 안식의 승리이다." (Spurgeon)
- "형제 여러분, 영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좋은 이름(a good name)이 무엇입니까? 좋은 이름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고, 그것은 어떤 값진 향유보다 더 달콤한 것입니다." (Spurgeon)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2절):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 이유는 솔로몬의 말대로 나의 죽음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상집은 솔로몬이 말하듯 죽음이라는 나에게 미래에 닥칠 그 사실을 마음에 받아들이기(take it to heart)에 좋은 곳입니다.
해 아래에서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최대한 즐기기로한 그의 결심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는 죽음을 직시하고 그 사실을 마음에 받아들이기를 독자들에게 권면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2절의 전제에서 결론 내립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 (3절): 누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대목에서 머뭇거리다가도 우리는 그의 말에 수긍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다 (4절): 잔칫집에서보다 우리는 초상집에서 더 많은 지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전도서를 시작하면서 솔로몬은 해 아래에서의 삶을 경험하고 무의미함과 행복의 부재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잔칫집과 초상집의 그의 말에서 솔로몬은 우리에게 이 차이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행복하지 않은, 또는 행복하지 못한 삶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행복하지 못할까요? 하나님은 해 아래에서도 우리가 행복하도록 삶을 주셨지만, 행복하지 못한 삶은 살도록 선택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그 답은 우리의 영원에 대한 믿음의 유무(有無)에 있지 않을까요?
전도서 7:5-9.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지혜로운 사람의 질책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다 (5절): 전도자는 초상집에 있는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을 따라 여행을 계속합니다. 그는 죽음을 거부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어리석은 자의 즐거움보다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역경과 고통 속에서 지혜를 구하는 것이 낫다고 조언합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의 웃음도... 헛되다 (6절): 바보의 빈 웃음소리를 '가마솥 밑의 가시나무 타는 소리'와 같이 탁탁 소리를 내는 그의 웃음도 헛되다고 말합니다. 가시나무가 타면 가마솥은 뜨거워지지만 가시나무는 금방 타서 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삶의 기쁨에서 나오는 그의 웃음소리도 순간적인 소리에 지나지 않아 실체가 남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큰 웃음소리는 공허함만을 남기고 곧 공중으로 사라집니다.
억압은 지혜로운 사람의 이성을 파괴하고 (7절): 직역했는데, 무슨 뜻일까요? 한글성경은 '탐욕'으로 번역하는데 영문은 '억압, 공갈'로 번역합니다. 억압받고 고난받는 역경은 삶에서 교훈이 될 수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도가 넘으면 지혜로운 사람의 이성을 파괴할 수 있고, 뇌물 앞에서 지혜로운 사람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인내심이... 교만보다 낫다 (8절): 일을 시작했으면 인내심을 가지고 끝을 내야 하고, 화를 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마음에 화가 나면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7:10-12. 생명을 주는 지혜
옛날이 오늘보다 더 좋은 이유가 무엇이냐? (10절): 이런 성향은 오늘이나 옛날이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옛날을 그리워하고 현재의 삶을 비관적이고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것을 솔로몬은 경고합니다. "해 아래에서 새로운 것은 없다" (전 1:9)고 절망했던 솔로몬은 어디로 갔을까요? 우리는 과거에서 배우고 현재를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혜는 유산처럼 좋은 것이고, 햇빛을 보는 사람들에게 유익하다 (11절): 전도자는 지혜가 유산(돈)처럼 해 아래에서 우리 인간을 보호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지혜)만이 지혜를 가진 주인의 생명을 보존한다고 조언합니다. 지혜와 돈으로 거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지만, 지혜만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는 설명입니다. NLT 영어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지혜와 돈으로 거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지만, 지혜만이 너의 생명을 살린다 (전 7:12)
전도서 7:13-14. 형통한 날과 재앙의 날 모두를 만드신 하나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구부린 것을 누가 펼 수 있겠느냐? (13절): 솔로몬은 하나님이 구부리신 것은 인간이 펼 수 없다고 운명론과 같은 말을 합니다. 따라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재앙의 날에는 생각하여라 (14a절): 하나님께서 세상의 선과 악을 만드셨듯이, 사람에게 구부린 날도 곧은 날도 두 날을 다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은 주어진 상황에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재앙은 날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절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이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의 앞 일을 알지 못한다 (14b절)
이것이 우리가 늘 인내하고 겸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세상에서 살 수 있기 위해, 사람으로서 가져야 하는 지혜가 아닐까요? 하나님이 만드신 그 시스템에 반항하지 말고 순응하고 복종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오늘을 살도록 솔로몬은 조언합니다. 전도서는 공부할수록 알쏭달쏭한 책입니다.
BIBLIOGRAPHY:
https://enduringword.com/bible-commentary/ecclesiastes-7/
개역개정 아래의 볼드체 성경구절은 NKJV 영어성경에 기반한 저의 개인 번역입니다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구절 위 코멘트 중 존칭어의 텍스트는 저의 개인 멘트이고, 청색 텍스트의 반어체는 인용, 번역 및 수정문구입니다.
인용 중 재인용은 이탤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예: 성경, 외국 학자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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