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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성경묵상

마태복음(Matthew)18:21-35(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by 미류맘 202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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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진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은 무제한으로 용서하라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빚을 진 종과 주인의 비유를 통해 용서받은 모든 사람은 마음으로부터 자기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고 경고하십니다. 

 

마태복음 18:21-22. 베드로의 질문: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21. Then Peter came to Him and said, “Lord, how often shall my brother sin against me, and I forgive him? Up to seven times?”
22. Jesus said to him, “I do not say to you, up to seven times, but up to seventy times seven.”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개인번역) 21.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2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21절): 베드로의 용서에 대한 질문입니다. 7은 행운의 숫자인데 왜 일곱 번일까요? 학자는 설명합니다.

  • "랍비들은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고, 세 번 이하로 권고했다... 그래서 베드로의 일곱 번은 관대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모든 한계와 계산을 없앤다." (France)

당시 랍비들이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할까요?" 예수께 물으면서 자신의 관용이 인정받기를 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명령하십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22절): 예수님의 대답은 "7 x 70번 = 490"번 용서하라. 이 말씀은 "490번 용서하라"가 아니라 "무제한으로 용서하라"입니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마 18:21, 이미지 소스: https://davidewart.typepad.com/)


마태복음 18:23-27. 천국: 빚을 진 종과 주인의 비유

23. “Therefore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certain king who wanted to settle accounts with his servants.
24. And when he had begun to settle accounts, one was brought to him who owed him ten thousand talents.”
25. “But as he was not able to pay, his master commanded that he be sold, with his wife and children and all that he had, and that payment be made.
26. The servant therefore fell down before him, saying, ‘Master, have patience with me, and I will pay you all.’
27. Then the master of that servant was moved with compassion, released him, and forgave him the debt.”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개인번역) 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그의 종들과 결산하려 하는 어떤 왕과도 같다. 24. 왕이 결산하기 시작하지, 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불려 왔다."  25. 그러나 그 종이 돈을 갚을 수가 없어 그의 주인은 그에게 아내와 아이들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래서 종이 그의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인님, 참아 주십시오. 제가 주인에게 모든 것을 갚겠습니다.' 27. 그러자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를 풀어 주고, 그 빚을 없애 주었다."

하늘나라는 그의 종들과 결산하려 하는 어떤 왕과도 같다 (23절):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비유로 설명합니다. 학자들은 당시 만 달란트는 "현대적 가치를 1200만 달러에서 10억 달러 사이"로 말합니다. 즉,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5절): 당시 노예 하나의 가격은 최고 1 달란트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비유 속에 종이 주인에게 진 빚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도 갚을 수 없는 금액입니다. 종은 애청합니다. 

주인님, 참아 주십시오. 제가 주인에게 모든 것을 갚겠습니다 (26절): 비유 속의 종은 의미 없는 약속을 합니다. 그는 주인에게 '인내심(patience)'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가 구해야 할 것은 자신에 대한 '용서(forgiveness)'였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를 풀어 주고, 그 빚을 없애 주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마태복음 18:28-30. 동료를 용서하지 않는 용서받은 종

28. “But that servant went out and found one of his fellow servants who owed him a hundred denarii; and he laid hands on him and took him by the throat, saying, ‘Pay me what you owe!’
29. So his fellow servant fell down at his feet and begged him, saying, ‘Have patience with me, and I will pay you all.’
30. And he would not, but went and threw him into prison till he should pay the debt.”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개인번역) 28.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그의 동료 종 하나를 만났다. 그 종은 그를 손으로 붙들어 멱살을 잡고 말했다. '내게 빚진 것을 갚으라!' 29. 그 동료는 종의 발 아래에 엎드려 간청하였다. '참아 주게. 내가 모든 것을 자네에게 갚겠네!' 30.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고, 가서 그가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집어넣었다."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그의 동료 종 하나 (28절):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당시 일용직 노동자의 일당이 1 데나리온이었으니 100 데나리온은 100 일치 임금이었습니다. 계산하면 주인에게 진 빚의 60만 분의 1입니다. 종이 주인에게 진 빚은 천문학적 숫자이나 이 빚은 진짜 빚입니다. 그는 빚진 동료를 만나자마자 친구의 멱살을 잡고 말합니다: 내게 빚진 것을 갚으라!

참아 주게. 내가 모든 것을 자네에게 갚겠네! (29절): 동료는 자신이 주인에게 한 같은 간청을 합니다. '주인님(Master)만 없고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인정사정없이 그 종은 동료를 감옥에 집어넣습니다.


마태복음 18:31-34. 이 악한 종아!

31. “So when his fellow servants saw what had been done, they were very grieved, and came and told their master all that had been done.
32. Then his master, after he had called him, said to him, ‘You wicked servant! I forgave you all that debt because you begged me.
33. Should you not also have had compassion on your fellow servant, just as I had pity on you?’
34. And his master was angry, and delivered him to the torturers until he should pay all that was due to him.”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개인번역) 31. 그래서 그의 동료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그들의 주인에게 그 일을 모두 말하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를 불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나에게 간청했기에 내가 네 모든 빚을 다 없애 주었다.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겼듯이, 너도 너의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냐?' 34. 그 주인은 노하여, 자신에게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 간수들에게 넘겼다.

그의 동료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31절): 이 비유에서 용서 받은 종이 잘못을 인정한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대신 그의 친구 종들이 그의 잘못을 주인께 보고합니다. 그래서, 주인은

이 악한 종아!... 그를 감옥 간수들에게 넘겼다 (32-34절):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종이 자신의 친구에게 하듯 똑같이 그의 주인이 종에게 하였습니다. 그 자신은 용서받고 자신의 친구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종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에 대해 행한 자비를 거두어들이고 종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로 그의 행위를 갚습니다. 

주인은 자비(mercy) 대신 정의(justice)로 종에게 갚습니다. 

마태복음 18:31-34.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35. “So My heavenly Father also will do to you if each of you, from his heart, does not forgive his brother his trespasses."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개인번역) 35. "그러므로 너희 각각이 마음으로부터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행하실 것이다."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행하실 것이다 (35절): 결론을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도 네가 갚은 대로 갚으실 것이다." 원칙은 명확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이신 죄 없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갚으셨습니다. 그 빚과 죄를 비교하면 형제가 우리에게 빚을 지어 진 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용서는 작은 것부터 시작됩니다. 형제의 작거나 큰 죄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나의 죄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했듯이 우리의 회개는 작은 용서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위험한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학자는 말합니다: 

  •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  "하나님은 나의 회개 없이는 나를 용서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 죄를 짓는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회개할 때까지 용서를 보류해야 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방정식에서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은 용서받은 적이 없으신 분이고 용서가 필요하지 않은 분으로 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용서를 받았고 지속적인 용서가 필요한 사람으로 서 있다.

  •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우리는 회개의 전제조건 없이 하나님보다 훨씬 더 빨리 용서해야 한다. 왜냐하면 용서받은 죄인으로 서 있고, 지속적으로 용서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용서의 의무가 있다.

  • 용서 화해를 구별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관계의 진정한 화해는 양측이 그것에 동의할 때만 일어날 수 있고, 이것은 갈등의 한쪽 또는 두 쪽 모두에 대한 회개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용서는 일방적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까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역도 성립된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의 위치는 절대적으로 다르고, 예수님은 '형제(다른 사람들)를 무조건 용서할 것'을 조언이 아니라 명령하셨습니다. 누가는 기록합니다.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개역개정, 눅 17:4

학자는 또한 용서와 화해를 구별해야 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두 상황을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사안은 매우 민감해 보입니다. 용서는 일방향이고 화해는 쌍방향입니다. 용서는 무조건 상대방의 잘못을 없던 일로 하는 것이고, 화해는 양쪽의 동의 하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화해를 해야 할 상황에서 자신이 용서를 했다고 스스로 자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감옥은 왜 있을까요? 다 용서해 주면 감옥이 필요 없는데? 감옥은 (또는 사형은?) 필요악 아닌가요? 학자는 부가적으로 설명합니다: 

  • 추가적으로, 용서가 반드시 그들의 죄의 민사적 또는 실제적인 결과로부터 누군가를 보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집주인은 개인적으로 그의 집에서 도적질 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지만, 강도는 체포되어 감옥에 가는 것이 적절하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용서가 필요하다. 시민적, 사회적 차원에서, 죄를 진 사람은 치안 판사들에 의해 처벌되어야 한다 (로마서 13장).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용서에 다소 인색하시니, 용서에 다소 인색하라!"로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이 비유의 모든 요점을 놓치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개역개정, 눅 6: 36)

마음으로부터: 더욱 중요한 것은 '말로만' 용서하지 말고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명령하십니다. 말로만 용서하면 진정으로 용서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행하실 것이다!"

  • 학자는 말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려는 자는 용서받기를 기대할 수 없다!" (France)

  • 야고보는 기록했습니다 (야 2:13):
    "자비를 베풀지 않은 사람에게 심판은 무자비하다 (judgment is without mercy to the one who has shown no mercy)"

예수님은 비유에서 우리는 용서하지 않은 사람의 벌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료를 용서하지 않은 종을 그의 주인은 감옥 간수들에게 넘겼습니다 (34절). 야고보가 썼듯이, 자비를 베풀지 않은(용서하지 않은) 자에게 심판은 무자비합니다.

오늘 말씀은 22절로 선택합니다. 아래 사진은 어제 산책 때 찍은 사진입니다. 보름달인데 날이 흐려서 달은 볼 수 없었습니다. 낮과 밤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풍경이 신비롭습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마 18:22, 이미지 소스: Copyrightⓒ https://4miryu.tistory.com/)

 

오늘의 말씀은 산수로 끝냅니다: "7 x 70 = unlimited"

 

BIBLIOGRAPHY:
https://enduringword.com/bible-commentary/matthew-18/
개역개정 아래의 볼드체 성경구절 및 추가로 인용된 성경번역은 NKJV 영어성경에 기반한 저의 개인 번역입니다
(한.영 성경의 여러 버전을 참고하여 번역한 것으로,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구절 위 코멘트 중 존칭어의 텍스트는 저의 개인 멘트이고, 청색 텍스트의 반어체는 인용, 번역 및 수정문구입니다.

인용 중 재인용은 이탤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예: 성경, 외국 학자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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