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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이스라엘(Day6)

35. 회심한 바울이 복음을 전한 가이사랴 항구(2부)

by 미류맘 2017.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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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말 도시를 둘러싸고 당시 주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벽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640년에 아랍의 정복에 의해 가이시랴는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며 쇠락한다.


2017년 2월 14일(화)7: 회심한 바울이 복음을 전한 곳, 가이사랴 항구


항구에서 본 Site Map으로 시작합니다. 항구 규모가 크기도 하고 그룹투어라
천천히 볼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공부하고 우선 '찍고보자'로 시작했네요.
각 장소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어디가 어디인지...


길양이들도 보이네요.


주변에 카페가 있던데 그건지...



 예루살렘 북서쪽 105㎞ 지점에 위치하였다. 

당시 로마 총독부가 위치한 팔레스타인 제일의 거대 도시로 주민 대다수는 헬라인이었다. 

신약성경에서 가이사랴는 집사 빌립이 전도한 성읍 중 하나로 언급되었다(행 8:40). (출처: 라이프 성경사전)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행 8:40)


<아소도 : Azotus >는 아스돗의 그리스 이름이다( 11:22). 빌립이 사마리아를 전도하던 중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주고 곧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 간 곳이 바로 이곳 아소도이다( 8:40)



회심한 바울이 고향 다소로 가는 도중에 이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후에 2, 3차 선교여행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귀향할 때 이 항구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출처: 라이프 성경사전)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행 9:30)


<다소 : Tarsus > 소아시아의 남동쪽 해안에 있던 길리기아의 수도이다(행 22:3) (출처: http://bible.goodtv.co.kr)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행 18:22) 


<안디옥 : Antioch > 바울의 전도여행을 시작으로 교회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지중해 연안 도시이다.

성경에 중요하게 언급된 안디옥으로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수리아의 안디옥이 있다. (출처: http://bible.goodtv.co.kr)

 


항구 "Sebastos"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공사는 원대한 사업이었다. 여기에는 부두와 방파제들을 위한 기초의 역할을 하는 바다 안에 세우는 인공 섬들이 포함된다. 원자재와 기술이 헤롯의 건축가들에게 이 프로젝트를 돕기 위해 실제로 로마 기술자들에 의해 보내졌다. 

이집트에서 로마로 선박으로 제공되는 통과무역과 서비스가 항구 존재의 이유였언 것 같다. 


음... 말하자면 오늘날 비행기의 'transit' 서비스인데 그런 개념이 헤롯 때부터 존재했단 말입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또한 3차 선교여행 후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바울은 이곳에 감금되어 있다가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 아그립바 2세 앞에서 변론하였고, (출처: 라이프 성경사전)


그리고 유대인들의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가 시작됩니다.


"백부장(100명의 군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로마의 지휘관)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삼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명과 마병 칠십명과 창군 이백명을 준비하라 하고" (행 23:23)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행 25:12) 



그리고 바울이 로마로 압송될 때 이곳에서 출항합니다.


"수일 후에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샤랴에 와서" (행 25:13)


<아그립바 : Agrippa > 신약 시대 유대의 왕이다. 성경에는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AD 37-44)와 

그의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 2세(AD 50-93)가 등장한다(행 12:5; 25:13) 


<버니게 : Bernice > 헤롯 대왕의 증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2세의 누이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큰 딸이자 드루실라(행 24:24)의 언니이다.


<베스도 : Festus > 네로 당시 벨릭스의 뒤를 이은 유대의 총독이다(행 24:27). 그는 AD 60년에 부임하여 2년 후 죽었다. 그의 전임인 벨릭스보다는 선량한 정치가였다. (출처: http://bible.goodtv.co.kr)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이탈리아)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행 27:1) 


<율리오 : Julius > 로마 아구사도대의 백부장으로 바울을 로마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다(행 27:1). 

그는 시돈에 도착했을 때 바울에게 친절히 대접하여 바울의 친구들이 동행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행 27:3). 

(출처: http://bible.goodtv.co.kr)



장미 모양으로 장식된 석관(棺):


단순히 장식된 매우 큰 석관(유해(遺骸)를 안치하기 위해 돌로 쌓은 구조물, 특히 석판으로 만든 널)이다. 

멋대로 손을 댄 뚜껑과, 부각으로 장미 모양으로 장식된 양 끝에 돌출된 두 개의 사다리꼴 또는 삼각형의 "손잡이(handles)"를 가지고 있다. 




석관을 보지 못해 현지에서 아령같이 생긴 이 무지막지한 돌덩어리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이 석관의 재질은 대리석인데 로마시대 말기 (2-3 CE)경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석관을 외국 박물관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검색 결과 석관은 관 위에 대리석이나 돌로 만듭니다. 

주로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인들이 사용했습니다. 보통 조각품이나 글자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이사랴에서 발견되는 석관은 매우 특이하게 보입니다. 외관상으로는 매우 투박하고 예술성이 부족해 보이는데...



고르곤(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머리로 장식된 석관 뚜껑:


이 석관은 부각으로 신화적인 고르곤으로 양쪽 끝을 장식한 것입니다.

아무리 석관으로 벌레와 도둑에서 관을 보호하기 위해 올렸지만 이 무덤에는 관이 보이지 않군요.



한 검색 결과는 흥미로웠는데 '석관'이 'eater of flesh'(살을 먹는 존재)라고 합니다.

사체를 돌 안에 안장할 때 사체가 벌레 등에 먹히거나 도둑으로 부터 보호해 준다고 믿었다 합니다.

그리고 관이 자주 부서지거나 도둑질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사람들은 관 위에 메두사의 머리를 새겨서 먹히거나 도둑질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했습니다.

얼마나 달리면서 찍었는지 전 이 사진을 제가 찎었는지도 기억이 안나네요.

(자료 참조: https://viviennemackie.wordpress.com)



카이사레아 국립공원은 이스라엘 지중해안의 샤론평야 북부지대의 크로코다일 강과 하데라강 사이에 위치해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카이사레아 지역은 침식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항만을 따라 있는 곳으로 고대부터 인류가 자연히 항구로 사용되어왔으며,

성경에도 여러 차례 언급되어있다(사도행전 8장-27장). (출처: 두산백과)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최초로 이 곳을 항구로 사용했으며, 스트라톤 망대(Straton Tower)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헬레니즘 시대에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출처: 두산백과)



가이사랴 항구 아치 프로젝트:


고대 항구 가이시랴의 아치는 아우그스투스 시저(Augustus Caesar)를 위해 헤롯대왕이 1세기에 건설한 "로마와 아우구스투스 신전의 부분이다. 이 신전은 전체 도시를 올려다보면서 인조 단(artificial podium) 위에 우뚝 서 있다. 수년에 걸쳐서 중요한 종교 기념물들이 이 단(壇) 위에 세워졌다. 일부 아치들의 복원과 개발, 그리고 신전 계단은 (壇)의 김동적인 유적들과 아름다운 신전을 보여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아치 프로젝트인 모양입니다. 



B.C.90년에 알렉산더 야누스(Alexander Jannaeus)에 의해 정복되어 하스모니아 왕국의 영토로 병합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B.D.63로마가 이 지역을 점령한 뒤 B.C.40년경에 실질적인 통치권을 헤롯에게 위임했다. 

헤롯은 이 곳을 항구도시로 발전시켰으며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서 ‘카이사레아’라고 명명했다. (출처: 두산백과)

 


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A.D.37-100)의 ‘유대전쟁사’에는

헤롯이 흰 석재로만 도시를 재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유대전쟁사 I:21:5). (출처: 두산백과)

 


카이사레아는 신전, 원형극장, 시장, 주택지들이 계획적으로 건설된 설계도시였으며, 도시가 완공되는데 12년이 걸렸다고 한다.

 



B.C.10세기 이후 도시는 크게 발전하여 상업중심지로 성장했으며,

기원후부터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는 로마 총독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3-4세기에 이르러서 카이사레아는 유대인, 기독교인, 사마리아인 등이 공존하는 국제적 상업도시가 되었으며, 

비잔틴 시대까지 계속 번영을 누렸다. (출처: 두산백과)

 


6세기 말엽에는 도시를 둘러싸고 성벽이 건설되었는데, 당시 주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벽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640년에 아랍의 정복에 의해 카이사레아는 정치적, 경제적 중요성을 상실하고,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며 쇠락한다.

(출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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