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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이스라엘(Day6)

37. 건축의 천재 헤롯대왕의 왕궁이 있었던 가이사랴 항구(4부)

by 미류맘 2017.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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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의 천재 헤롯대왕의 왕궁, The Promontory Palace"  


2017년 2월 14일(화) 9: 지중해를 바라보는 왕궁에서 야망을 꿈꾸웠을 헤롯대왕 



왕궁은 몇 단계로 세워졌고 몇 차례의 개조를 걸쳤다. 로마 시대 말기에 전구역의 역할이 바뀌었다.

위쪽 왕궁은 비잔틴 시대 말에 버려지기 전에 개인 주거지로 분할되었다.

히포드롬 경기장과 왕궁이 모두 그 기능을 잃었을 때, 예배당과 공중 화실을 포함한 건물들이 그 잔해 위에 세워졌다.

초기 이슬람 시대에, 극장의 전구역은 *리바트(*지하드, 또는 "성스러운 전쟁"의 목적으로 세워진 요새)로 바뀐 것 같다.


※ 리바트(ribat, 수도장: Sufi파 신도(수행자)의 수도 생활을 위한 [공동도장)

※ 지하드(Jihad, 지하드의 전사)



설명에 의하면,

 

1단계인 헤롯왕(?)부터 초기 로마시대 때, 아래층(2층), 윗층 (1-2층?),
포르티코, 
페리스타일 (주주식(周柱式) 마당, 접견실, 목욕탕, 아치형의 물탱크

2단계인 로마시대 때, 우물, 입구, 대형 목욕탕, 사무실 및 행정 기구들, 주랑 (또는 바실리카) 등이 건설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헤롯대왕부터 로마시대 때 까지 세워지고, 유지되고, 파괴되었을 왕궁은 아마 발굴에 의해 

흔적터만 남고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돌들을 모아서 세워두었겠지요.



 일부 벽은 이전의 벽 그대로인 것도 같네요. 



 일부 기둥과 잔해만 남은 오래된 궁전터를 사람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아래 안내문은 많이 깨져 있는데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Barrel - Vaulted underground cistern from the early Roman period.
(대형통 - 로마시대 초기의 아치 모양의 지하 물탱크)





헤롯대왕의 건축물에서 물 시스템에 대한 것은 경이롭지만 이곳의 물 시스템 또한 놀랍습니다. 

어떻게 짠물을 받아서 민물로 만들어 호수로 끌여들여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었을지...



 "(Po)tius Pilatus, the prefect of Judaea, (erected) a (building dedicated) to (the emperor) Tiberius".

찍다가 우연히 제 카메라에 잡협는데... 


"유대인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건물을 세워 티벨리우스 황제에게 바쳤다." 

모조품. 극장의 발굴 중 발견된 원본 글자는 에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Pilate stone”은 유대 주재 로마 제5대 총독(A.D.26-36년경)를 언급하는 부분적으로 온전한 조각된 석회암 파편이다 (82 cm x 65 cm). 이 조각은 1961년 가이사랴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의 고고학적인 현장에서 발견되었다. (자료참조: https://en.wikipedia.org)


가이사랴 옛 극장터에서 원본이 발견되어 원본은 박물관으로 가고 모조품이 이 곳에 있다는 말인데 

설명문만 찍고 실물은 안 찍은 모양입니다. 


'창을 가진 자'란 뜻의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반역죄를 씌워 사형을 언도한 유대 주재 로마 제5대 총독입니다.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 때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 후임으로 파견되었습니다.



페리스타일(주주식:周柱式) 정원의 상상도입니다.

이 곳에서 지중해의 바다를 바라보며 온갓 품위를 갖추면서 살았을 로마인들을 떠올려 봅니다.



이건 말굽 모양인데 무엇이었을까요? 혹시 정원?

공부도 할 겸, 현장에서 받은 가이사랴 브로셔(한국어)에서 역사적 배경을 편집.인용합니다.


페르시아 통치 시(586-332 BCE), 페니키아인들이 지중해 해변의 만들 중 지하수 수위가 높은 이곳에 거주지를 만들었다.

이 마을은 도르(Dor)주에 속해 있었고 헬레니즘 시대(332-37 BCE) 때 아주 번영했었다.

'제논(Zenon) 파피루스'(259 BCE)에서 최초로 '스트라톤(Straton) 망대'라는 이름으로 언급되었다.

(출처3: 가이사랴 한글 브로셔, 저자: Y. Porath)



도르와 스트라톤 망대는 103 BCE에 알렉산더 얀나이(Alaxander Jannai)에 의해 정복되어, 하스모니안 왕국에 편입되었다. 40년 후 로마가 이곳을 점령하자 다시 분리되었다. 30 BCE에 스트라톤 망대는 헤롯대왕(37-4 BCE)에게 하사되었다. 그는 이곳에 거대한 항구도시를 건설하고, 그의 후원자인 Octavian Augustus Caesar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가이사랴(Caesarea)'라는 이름을 붙였다.

(출처4: 가이사랴 한글 브로셔, 저자: Y. Porath)

.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 1권 408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헤롯은 해변에 인접한 스트라톤 망대라 불리는 폐허나 다름없는 도시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이곳이 같는 지리적인 장점이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흰색 돌로만 된 멋진 궁전을 세움으로써 이 도시를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출처5: 가이사랴 한글 브로셔, 저자: Y. Porath)




헤롯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는 폐허에 가까운 이 조직된 십자형 교차 도로, 신전, 극장, 원형 경기장, 시장 및 주거지 등이 있는 계획 도시였다.

도시를 건설하는데 12년이 소요되었고, 10/9 BCE에 완성을 기념하는 큰 축제가 열렸다. 이 도시는 빠르게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6 BCE에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로마 통치의 본부가 되었다.


(출처6: 가이사랴 한글 브로셔, 저자: Y. Porath)



가이드의 당시 물시스템에 대한 설명입니다. 

대형 관으로 물을 올려서 분배하는 모양입니다.


번영한 도시 가이사랴는 물 근원지가 필요했고, 북동쪽으로 7.5km 떨어진 수니 샘으로부터 높은 도수교를 통해 물을 가져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함께 거주했고, 이들 간의 갈등은 66년에 발생한 유대인 대발란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가이사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로마군단이 총본부가 되었다. 그래서 진압군의 사령관인 베스파시안(Vespasian) 장군이 이곳에서 황제가 되었음을 선언했던 것이다.

(출처7: 가이사랴 한글 브로셔, 저자: Y. Porath)



예루살렘이 함학된 이후에는 가이사랴는 식민지의 도시에 주는 호칭인 '콜로니(Colony)'가 되었고, 이스라엘에서 제일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Bar Kochva 반란을 진압할 때에도 가이사랴가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로마군들은 랍비 아키바(Akiva)를 비롯한 유대인 지도자들을 이곳에서 고문을 했고,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었다.

(출처8: 가이사랴 한글 브로셔, 저자: Y. Porath)



Promontory Palace(해변곶 궁전)에 대한 설명입니다.

가이사랴 항구에서 클라이맥스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건물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개인 공간으로 구성되는 Lower Palace와 공공 공간인 Upper Palace. 

커다란 주주식 정원 주변에 설립된 Upper Palace는 고위관리의 접대와 유흥 뿐 아니라 지도자의 재판과 행정 기능과도 연결되었다.

Upper Palace Lower Palace를 건설할 바로 후에 설립되었다


외쪽 아래 동전은 '본디오 빌라도의 동전', 오른쪽 동전은 '헤롯대왕 시대의 동전'



이 곶(모양의 궁정에 대하여 아래에 흥미로운 질문이 던져있습니다.

"과연 누가 이 궁전을 지었을까?  도시의 취임(? inauguration)에 즈음하여? 

가이사랴가 지역의 수도가 되었을 때 로마 통치자가 지었을까?

고고학 조차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없다.



가이사랴의 세 곳의 사암 곶(중 한 곳에 위치해서, 궁전은 뛰어난 파노라마 전경을 제공한다.

북쪽에서 히포드롬 경기장과 항구, 남동쪽에서 극장까지.

여기서 앞에 보이는 해안선 쪽에 헤롯왕의 궁전 장소같습니다



3-4C 때에는 이방인, 사마리아인,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함께 생활했으며, 그 중 유명한 사람으로는 랍비 아바후(Abbahu)와 교부 오리겐(Origen)과 유세비우스(Eusebius)가 있다.

(출처9: 가이사랴 한글 브로셔, 저자: Y. Porath)



비잔틴시대 동안 가이사랴는 계속해서 번영했으며, 1,500두남(1두남=1,000m2)까지 확대되었다.

6C 말에는 도시 주변에 성벽이 완성되어 이스라엘에서 제일 큰 요새화된 도시가 되었다.

(출처10: 가이사랴 한글 브로셔, 저자: Y. Porath)



640년 아랍 점령 이후, 가이사랴는 정치적, 경제적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떠나고, 작은 마을이 되어 점점 잊혀져 갔다.


(출처11: 가이사랴 한글 브로셔, 저자: Y. Porath)


마지막 가이사랴 항구 5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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