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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이스라엘(Day6)

38. 로마식극장, 헤롯극장, 기둥들, 가이사랴를 나가면서(5부)

by 미류맘 2017.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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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017년 2월 14일(화) 10: 로마식 극장, 헤롯극장, 기둥들... 가이사랴를 나가면서...


뒤에 보이는 것이 로마식 극장 (안내도 1번)으로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극장 중 가장 오래되었다.
헤롯대왕 때 만들어져서 비잔틴 시대까지 수백 년 동안 사용되었다. 

이 극장에는 2개층의 카베아(Cavea: 좌석이 있는 부분)가 있고, 약 4,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극장의 무대 앞 둥근 바닥 부분의 오케스트라 구역에는 대리석 모양으로 벽피가 발라져 있었다.

무대 두 편에는 다양한 장식을 한 스케아나에 프론스(Sceanae front: 3층으로 이루어진 높은 기둥들과 함께 만들어진 벽)가
무대 배경으로 사용되었다. 비잔틴 말기에는 이 곳을 요새로 개조해서 사용했고, 아랍이 이곳을 정복한 이후부터 방치되었다.

(출처12: 가이사랴 브로셔)


이 기둥의 연대기는 헤롯대왕 시대 (1세기 BCE부터 70 CE까지)로 올라간다.
이것은 전시된 가장 고대의 기둥이다. 헤롯대왕이 세운 화려한 빌딩 중 하나였을 것이다.


"기둥 머리'에 대한 이어지는 설명입니다.


고전세계에서 기획과 미학 원칙들은 분명하고 애매하지 않았다. 
도리아(Doric), 이오니아(Inonic) 그리고 코린트(Corinthian) 양식들은 그리스인들이 다듬었고, 
약간의 변경을 해서 로마인들이 받아들였다. 이러한 양식들은 그 자신의 법칙과 장식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기둥 머리들은 이 다른 양식들을 나타낸다. 

 
코린트 방식은 4세기 BCE 때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나타났고 대부분 가이사랴에서 발견된다.
비잔틴 시대 말기까지 이 양식은 유행되었다. 


코린트 양식의 기둥머리를 전시한 아래 또 설명이 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고전세계의 양식과 빌딩 방식의 오늘날 많은 지식의 근원은
로마 건축가이자 엔지니어 비트루비우스(Vitrivius)의 작품에서 나온다. 
약 이 천년 전에 그는 대표 저서인 De Architectura를 지필 하였다.
이 지역의 건축양식은 헬레니즘과 로마 전통을 지역과 수입된 재료와 결합하고 있고, 이 모든 것은 지역 상황에 적용되었다.


이 정원은 가이사랴 발굴 중에 발견되거나 우연히 발견된 일련의 건축 유물들을 보여준다.


9C가 되어서야 해상 무역이 재개되어 해안도시들이 회복되기 시작했으며, 가이사랴도 새로이 요새화되었다.
십자군이 1101년 5월 17일에 이 곳을 점령했고, 가르니에르(Garnier) 기사단이 이곳에 머물렀다.
1251년에 프랑스의 루이 9세에 의해 가이사랴는 웅장하게 새롭게 요새화되었다.

(출처13: 가이사랴 한글 브로셔, 저자: Y. Porath)


1265년 맘루크의 바이바르스(Baybars)에 의해 점령된 후,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이후 주변에 건무을 지을 때 돌을 제공하는 곳으로 전락해 버렸다.

19C가 될 때까지 황폐한 채로 방치되다가 오스만 터키 정부가 보스니아 피난민들을 이곳에 정착시켰다.

파괴된 십자군 요새롤 고쳐서 행정 중심지로 삼았고, 폐허 위로 집들을 새로 짓기 시작했다.


(출처14: 가이사랴 한글 브로셔, 저자: Y. Porath)



가이사랴의 바로 남쪽에 키부츠 스도트 얌이 1940년 세워졌고, 근래에 주변에 새로운 주거지들이 건설되었다.

(출처15: 가이사랴 한글 브로셔, 저자: Y.Porath)


이 광장은 비잔틴 시대의 '카르도'(Cardo: 중앙 관통도로)의 일부분으로 두 개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하나는 흰색 대리석을 만들어졌고, 다른 하나는 반암(Porphyry)으로 만들어졌는데 둘다 로마 황제를 조각해 좋았다. 혹자는 반암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은 하드리안(Hadrian) 황제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자이크에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플라비우스 스라티기우스(Flavius Stratigius)가 시장으로 재직할 때인 6C에 이곳에 재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이샤랴의 로마와 비잔틴 조각상들: 

대부분 가이사랴의 조각상들은 머리가 없이 발견되었다. 
황제들(?), 귀족(dieties?) 또는 고위관리를 재현한 로마 조각상은 비잔틴 도시의 장식품의 일부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기독교 상징과 같이 기독교 맥락에서 전시되기도 하였다.


"선한 목자(Good Shepherd)"로 예수를 표현하는 동상은 기독교식 모티프의 적용이다(Christian adaptation of a motif).
그 기원은 그리스 조각품의 기원으로 올라가고 그리스와 로마 예술로 지속된다.

머리없는 몸통만 있는 조각상이 섬찟했습니다.

 
1873년 팔레스타인 연구 기금(PEF)에서 행한 가이사랴에 대한 개괄적 탐사가 이곳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시작이었다. 이때 십자군 도시, 극장, 전차 경주장과 도수교에 대해 언급했다. 기둥들, 기둥머리들, 동상들 및 명각 기록물 등의 고고학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출처16: 가이사랴 한글 브로셔, 저자: Y. Porath)


1947년부터 제한적으로 발굴이 되다가, 1959-64년 대대적인 발굴이 있었다.
이탈리아 발굴단은 극장, 도시의 요새화 부분, 높은 도수교 등을 발굴했고,
이스라엘 발굴단은 십자군 도시부분, 유대인 주거지, 도수교 전반에 걸쳐 발굴했다.

(출처17: 가이사랴 한글 브로셔, 저자: Y. Porath)


이와 같은 발굴에 의해, 십자군 도시와 극장은 국립공원이 되었다.
이후 미국과 이스라엘의 발굴팀들에 의해 도시와 항구에 대한 많은 발굴이 이루어졌다.
1992년부터는 이스라엘 고유물협회(Israel Antiquities Authority)와 하이파 대학팀에 의해서 광범위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출처18: 가이사랴 한글 브로셔, 저자: Y. Porath)


헤롯 극장(Herod's Theater):

22-10 BC에 세워진 헤롯의 극장은 이스라엘에서는 최초의 극장이다. 로마와 비잔틴 시대 중에 이 건물은 몇 차례의 변화를 격었다.
극장이 음란한 오락을 제공해서 기독교 비잔틴 통치자가 AD 5세기에 극장의 문을 닫았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959년과 1964년 사이에 현장에서 대규모의 발굴이 이루어졌다.
대규모의 극장의 복원과 재건설을 통해 이 건물을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왔다. 
여름 밤에 극장은 야외 컨서트, 발레와 오페라 공연에 이 장소를 빌려주고 있다. 

오른쪽 아래의 가면은 비극과 희극의 가면.
원래 극장은 비극, 희극과 마임극을 공연하도록 기획되었다고 합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가 8:27)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마가 12:14)


그들은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오?" 대제사장들이 대답하였다. "우리의 왕은 가이사뿐입니다." ( 19:15)


여기까지 헤롯대왕의 수로 '가이사랴 항구'편을 마칩니다. 

너무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솔직히 이해가 어려워 여러 사이트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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