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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이스라엘(Day7)

42. 동굴의 땅의 소우주, 유대 저지대의 벧구브린 동굴

by 미류맘 2017.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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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여, 힘있는 사람들이 강한 사람들을 대항할 때 도와줄 분은 주밖에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2017년 2월 15일(수) 4: 에디오피아인과 유다인의 전쟁이 있었던 벧구브린 동굴

정식명칭이 '동굴의 땅의 소우주(小宇宙)-유대 저지대의 마레샤와 베이트구브린 동굴들
(Caves of Maresha and Beit Guvrin in the Judean Lowlands as a Microcosm of the Land of the Caves)로 알려진 동굴군이다.

가는 길마다 높이 쳐진 담이 이스라엘의 분쟁을 아직 느낄 수 있었다.

아랍과의 경계가 높이 느껴지는 도로. 경계에 높은 담은 그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듯...

위의 사진은 테러가 자주 생긴다는 동굴인데 들어가면서 좀 무서웠다.

벧구브린 동굴로 가는 길 하늘이 우리를 반긴다.

마치 천지창조를 보는 듯 가는 길이 신비하기만 하고...

가늘 길 온통 올리브 나무가 지천이다.

당시 기록한 자료를 보니 9시 목자들 들판교회 도착 후 휴게소에서 9시 50분 선물 구입 후에 
11시10분에 벧구브린 동굴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마레사와 벧구브린 동굴에 대한 설명이다.
벧구브린 동굴은 쌍둥이 도시인 마레샤와 같이 벧구브린(베이트구브린)국립공원의 일부이다.


"동굴의 땅의 소우주(小宇宙)-유대 저지대의 마레샤와 베이트구브린 동굴들"로 알려진 세계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에 관한 협약에 구현되어 있다. 이 동굴의 탁월한 세계적인 가치는 약 1800년 간에 걸친 채석과 지속적인 사용으로 인하여 인정받았으며,
약 750에이커의 면적에 약 500개의 동굴이 존재한다. 

안내문의 내용이다.


마레샤라는 도시는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으면 히브리어로 "머리(Head)"라는 단어에서 유래한다.
중요한 고대 도시인 베트 구브린(Bet Guvrin)은 멸망하였으며 헬레니즘 시대와 비잔틴 시대 말에 존재하였다. 

대부분의 종동굴들은 비잔틴과 이슬람 시대 초기 중에 발굴되었다. 벧 구브린은 십자군 시대 중에 작은 요새화 마을이었고 가운데에 교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 1949녈까지 아랍 마을이 있었고, 1949년 키부츠 벧구브린이 형성되었다. 

벧구브린 동굴은 '종' 모양과 같아서 종동굴로도 불리운다.

일행은 입구로 향하고..

동굴 입구가 보인다.

동굴은 여럽 겹의 흰색 석회암 아래에 묻혀 있다가 발굴되었다.
마레샤 동굴들은 BC 9세기경부터 만들어져 BC 3-2세기에 주로 사용되었고
벧구브린 동굴들은 1세기경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료: 두산백과)

변덕스럽던 하늘은 청명하기만 하다.

마레샤 지역에 약 200개의 지하단지에 2500여 개의 방이 발견되었고 (자료: 두산백과),

밷구브린 지역에는 1,000여개의 방들이 발견되었다 (두산백과).


석회암은 동굴 안밖에 지천이다.


동굴 안에서 밖으로 보이는 경치.

벧구브린에 대한 설명이다.


"벧구브린은 풍족과 풍요의 땅이며, 많은 대리석 채석장이 있다..."

그 채석방식의 결과인 특이한 모양으로 인해 'Bell Cave'라고 불리기도 한다. 
우선 0.9미터 이하의 둥근 손잡이(round shaft)가 단단한 표면 바위를 통과하여,
(이는 약 3미터 두께의 nari라고 알려져 있다) 그 아래에 있는 부드러운 백암층(백색 연토질 석회암)까지 절단된다
그런 다음 손잡이가 확장된다. (대각선으로 파인 자국 주목).
그리고 밧줄로 동굴에서 정사각형의 덩어리들을 이동시킨다. 

동굴의 채석작업은 비잔틴 시대부터 시작되었고, 초기 이슬람 시대 때 전성기를 맞는다. 
채석된 돌들은 공사와 석회를 생산에 사용되었다. 
따라서 벧구브린은 중요한  백악 공급의 중심부였다. 


집 나간 며느리도 이 맛 보면 돌아온다는 가이드의 설명. 쥐암나무 열매~

열매가 한 개당 0.2그램으로 일정하다고 한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과 인공적으로 만든 동굴이 현존하였던 벧구브린 동굴군은 가히 '인간이 만든 지하세계'라고 부를 수 있다.

동굴 입구를 들어가면서 'Bell Cave'라는 안내가 눈에 띈다.
종 모양의 석회암 동굴인 벧구브린 동굴은 800여 개에 이르는데 높이가 18미터에 이른다.


통로를 통해 여러 동굴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어떻게 이런 동굴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을까 의아스럽고 경이스럽다.

2004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 곳은 유대왕국부터 아랍인, 그리스, 로마제국 등 여러 세력의 지배를 받은 곳인 이 곳은 3-4세기에는 유대인, 7-10세기에는 아랍인이 지배했가도 전해진다. 사진은 종동굴(Bell Cave) 입구.

자료 출처 참조: 유네스코 세계유산, 두산백과 등 

비잔틴시대에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였다. 마레사(Maresha)와 함께 이스라엘의 고대 유적지로 알려진 벧구브린(Bet Guvrin, 베이트구부린 동굴은 베이트구브린의 지하에 조성된 두텁고 부드러운 균질의 석회암 지반에 용도별로 배치된 총 3,500여 개의 지하 동굴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이 유적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로 향하는 무역로의 교차점에 위치해 있다.

역대하 성경에 의하면, 이 곳에서 에디오피아인 세라와 유다인 아사 사이의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역대 14:9-10)
유다인 아사는 여호와가 보시기에 율법과 명령으로 지켰기 때문에(대하 14:2-4) 여호와는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한다.
이 동굴의근처에는 비잔틴 시대 때 세워진 '성 안나교
회'가 있다고 하는데 일정표에는 있었는데 들리지 못했다.
자료에 의하면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 때 이 곳을 점령하고 1949년 이 곳에 벧구브린 키부츠가 생겼다고 한다.

이곳에 위치했던 팔레스타인 마을 바이트 지브린(Bayt Jibrin)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후 없어지고
이스라엘의 베이트 구브린 키부츠가 들어섰다. (자료: 두산백과)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2015년 주민이 414명이었다고 기록 된 것으로 보아 최근까지 사람들이 주거하지 않았을까... 

'자유인의 도시'라는 이름은 200년경 로마 황제가 이곳에 거주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였다고 한다. 

동굴에서 올려다보니 천장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석회암 천창이 있다. 자연의 신비함이 느껴진다.

우리는 내려가지 못했는데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다고 한다. 벽면에 손바닥만한 구멍이 2000여개가 뚫려있는데
이것들은 비둘기들을 사육한 둥지하고 한다. 비둘기는 식용으로 그리고 똥은 사료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 냄새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최근에 우리 집에 들어왔던 쥐 한마리가 풍기는 냄새가 집을 진동하는데...
(자료 참고 출처: http://dic.tjc.or.kr/)

아사 왕에 마주나가 마레사의 스바다(구브린) 골짜기에 진치고 전쟁을 벌이게 된다. 아사의 군대는 유다 중에서 삼십 만 명이 있었고 베냐민 중에서 이십 팔 만 명의 군사가 있었다. 이때 아사는 여호와께 간절히 부르짖어 구하였다.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대하14:11) 

자료출처: http://blog.daum.net/sunghwa


이궁~ 언니가 구경하다 넋을 잃고 바닥에 꾸당 넘어졌다. ㅠㅠ 화장실에서 닦고
다녀온 후 자료를 정리하니 가히 '동굴의 땅의 소우주(小宇宙)'라고 부름직하다.
아래는 종동굴의 동영상.

아래는 목자들 들판교회 영상인지... 오래되서..

지나가는 곳이 삼손의 고향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동굴에서 넘어진 언니가 화장실에서 닦고 나오더니 멀쩡해졌다~

아래는 지천에 깔린 양귀비꽃의 동영상

10시 40분경 잠시 일행은 버스로 이동하여 가족무덤 (Apollophanes Cave)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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