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장 전반부에서는 범죄하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된 반면, 40장에서 시작하는 후반부에서는 구원을 주제로 다룹니다. 40장은 '나의 백성을 위로하라'라는 메시지로 후반부를 시작하면서 포로생활을 할 백성을 향한 위로와 희망을 말합니다.
쉽지 않았던 야고보서를 끝내고 이사야서 40장으로 넘어갑니다. 이사야서는 1년 전에 39장까지 QT공부를 했습니다. 개요 설명 대신에 그 당시 바이블프로젝트에 포스팅되었던 영문 동영상 스크립트 작업한 2건을 대신 링크합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바이블프로젝트 한글판이 나왔습니다. 그 동영상도 링크합니다. 좋은 작업 해 주신 프로젝트팀에게 감사드립니다. 한글 스크립트는 자동추출만 됩니다.
1. “Comfort, comfort my people,” says your God.
2. “Speak comfortably to Jerusalem; and call out to her that her warfare is accomplished, that her iniquity is pardoned, that she has received of Yahweh’s hand double for all her sins.”
희망의 말씀
1. 너희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1. '위로하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2. 예루살렘에게 위로하여 말하고, 그들의 전쟁이 끝났고, 그 죄가 사함을 받았고, 여호와의 손에서 그들이 지은 죄의 두 배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 아 래(인용 및 편집: sermonwriter 그리고 개인 멘트 포함) -
'나의 백성을 위로하라!'는 메시지로 40장이 시작됩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성경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번역 및 편집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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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나(우리)'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하늘 천사의 무리와 같은 신성한 집회일 수도 있고, 선지자일 수도 있다. 누가 전달하는가 하는 '메신저'보다는 전달하는 내용의 '메시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만일 중요하다면 언급이 되었을 것이다.
"위로하라" (na·hamu—na·ham에서) (1a절). 이 단어 na·ham은 구약성서에서 자주 발견되며 두 가지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주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것을 근심하신 것처럼 후회("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6)하시는 것이고, 둘째는 이 구절에서 말하는 슬픔이나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을 향한 위로나 위안이다.
“ 나의 백성을 위로하라” (1b절).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슬픔과 절망에 대하여 쓴 '예레미야애가'의 내용과는 반대되는 내용이다. 예레미야애가는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애 1:2) 라고 기록하지만, 여기에서의 명령은 백성을 위로하는 것이다.
위로받을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셔서 아브람으로 시작하는 그들과 언약을 하셨다 (창 12:1-3). 그 당시 아브람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의 백성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에 대해 벌을 주셨지만, 그들을 내쫓지는 않으셨다.
1장부터 39장까지는 유다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다른 나라들과의 동맹에 의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형벌을 간략히 서술하였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파괴될 것이고 백성들은 오랜 기간 동안 망명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일은 사실 일어났고, 그 기간은 거의 50년간 지속되었다. 유대인들은 오래 전 이집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노예 생활을 하였다.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망명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새로운 세대가 노예로 태어났다.
미국 흑인 노예들의 애처로운 노래만 들어도 사람들이 노예로서 경험하는 절망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노래들은 슬픔과 희망을 표현한다. 그들은 애절하게 노래했다: "내려가요, 모세여, 이집트 땅에서 내려오세요.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풀어달라 말하세요.'
“위로하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와 같은 희망의 씨앗을 발견한다. 여호와는 예루살렘의 죄에 대해 벌을 주었지만, 처벌의 목적은 그들의 고통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이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더러움이 깨끗해질 수 있도록 불행을 겪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이 택한 백성으로서의 이전 지위 - 완전히 잃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불성실함으로 인해 재타협할 수 있도록 - 로 돌리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
“너희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elo·he·kem) (1c절). 바로 전의 구절에서 하나님은 '나의 백성'을 위로하라 말씀하셨다. 이제 그는 자신을 "너희 하나님"이라고 정체를 밝힌다. 이것은 여호와와 유대 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고리를 인식시키는 호칭이다.
그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이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엘로힘(Elohim)이다. 엘로힘은 신이라는 뜻의 엘(El)의 복수형이다. 엘로힘은 때때로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들에 대해 사용된다. "복수의 형태가 하나의 신에 사용될 때, 히브리 문법학자들은 그것을 "위엄의 복수"라고 부른다. 마치 왕이 자신과 그가 명령하는 사람들을 칭하기 위해 "we(우리)"를 사용하는 "royal we"와 같다.
“예루살렘에게” (2b절). 위로를 받을 대상은 바로 예루살렘의 마음이다. 이 구절의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상징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해왔지만 곧 석방될 망명자들이다.
“위로하여 말하라” (al·leb—to the heart) (2a절). 직역하면 "마음에게 말하라"가 될 것이다. 우리가 마음 속 깊이 상대방을 위로하려고 한다면, 매우 부드럽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그녀'로 여성화)에게 전할 메시지가 나열된다 (아래):
"그녀에게 (ki-that절 아래의 사실) 그녀의 전쟁이 끝났다는 것, 그 죄가 용서받았다 것, (ki) 여호와의 손에서 그들이 지은 죄의 두 배의 벌을 받았다는 것을 외쳐라" (2c절). 이것은 예루살렘에, 유대인 망명자들에게 전해질 메시지이다. 그것은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하나의 메시지이며, 각각 소 단어인 'ki'로 소개된다. 다시 설명하면, 예루살렘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위안을 받아야 한다:
(1) 왜냐하면(ki) “예루살렘(그녀)은 임기를 채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징역을 살았고 이제 석방할 때가 되었다.
(2) 왜냐하면 (ki) “그의 전쟁이 끝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처벌이 범죄와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여호와가 처벌이 충분하다고 결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물론 후자이지만, 이 구절은 '일에 의한 구원'과 '은혜에 의한 구원'에 관한 논쟁과는 무관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가 더 이상 그들을 채무자로 취급하지 않고 모든 빚을 갚은 것으로 간주하실 것임을 예루살렘에게 확신시키는 것이다.
(3) 왜나하면 (ki) “그는 여호와의 손에서 자신이 지은 죄의 두 배의 벌을 받았다는 것 때문이다." 우리는 수학자로서 "두배"이라는 단어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그녀의 죄에 대해 많은 대가를 치렀으며, 여호와는 더 이상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시적인 방법의 표현이다.
번역과 편집을 위주로 글을 정리했습니다. 이사야서 전체 66장 중 앞 섹션(1-39장)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40-66장은 '하나님의 구원'을 다루는데, 전반부에서는 불복종하고 범죄하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었는데 40장에서 시작하는 후반부에서는 '구원'을 주제로 다룹니다. 그 주제에 맞게 '희망의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후반부가 시작됩니다.
'나의 백성을 위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되는 40장은 '왜 그들을 위로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세 가지로 나열됩니다. 첫째, 전쟁이 끝났고 둘째, 그들의 죄가 사함을 받았고 셋째, 그들이 지은 죄의 두 배의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구원을 향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재타협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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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e voice of one who calls out, “Prepare the way of Yahweh in the wilderness! Make a level highway in the desert for our God.
4. Every valley shall be exalted, and every mountain and hill shall be made low. The uneven shall be made level, and the rough places a plain.
5. Yahweh’s glory shall be revealed, and all flesh shall see it together; for the mouth of Yahweh has spoken it.”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3. 한 소리가 외친다.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곧게 하여라. 4. 모든 골짜기가 높아지고 모든 산와 언덕이 낮아지게 하여라. 고르지 않은 곳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야로 되어라.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사람이 함께 그것을 볼 것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다."
광야에서 한 소리가 외칩니다. 그 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메시지'임에 틀림없다. 그 소리는 외친다: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곧게 하여라" (3절) 우리는 하나님이 이 망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사막을 관통하는 대로를 준비할 것이라고 기대해왔다. 하지만 우리가 발견한 것은 정반대이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위한 대로를 준비한다.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첫째, 하나님은 왜 그들이 주님을 위해 대로를 마련해주길 원했을까? 둘째, 그들은 그 일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우리는 문자 그대로 이 시적인 언어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를 위해 사막을 관통하는 대로를 만들기 위해 삽과 곡괭이를 휘두르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준비가 필요한 것은 그들의 삶의 황야이자 마음의 사막이다. 만약 그들이 주님이 오시는 것에 대비하려면, 그들이 준비해야 하는 것은 기도나 성경을 읽는 것 - 올바른 예배와 순수한 삶 - 과 같은 일종의 영적 훈련과 관련되어야 한다. 소리는 준비의 형태를 명시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님이 오시는 것에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의 역사와 전통은 그들에게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줄 것이다.
“모든 골짜기가 높아지고 모든 산와 언덕이 낮아지게 하여라” (4a절). 이 표현은 마치 오늘날 도로 건설업자들이 중장비를 사용해서 언덕의 흙을 떠서 언던 아래로 내리고 계곡에 묻는 일련의 과정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언덕과 계곡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돌아오는 것을 방해했던 정신적 장애에 대한 시적 은유로 성경학자들은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가실 수 있도록 제거되어야 할 것은 죄악과 믿음의 부족입니다.
“고르지 않은 곳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야로 되어라” (4b절). 이것은 위와 같은 생각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즉, 백성은 주님이 오실 것에 대비해서 그들의 삶에서 울퉁불퉁한 땅과 험한 곳을 다듬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v. 5a). 영광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다양한 것들을 말할 때 사용되지만, 특히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때 사용되는데, 이것은 인간에게 위엄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모습과 관련된 아우라이다. 인간의 말을 이용해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하려 했던 성경학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집어삼키는 불길(devouring fire)'(출 24:17)이라고 표현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자고 하자,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 33:20)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출 33:21-23). 요점은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인간은 그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3절에서 말하는 '광야에서의 소리'는 세레요한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설명하면서 이 성경학자는 고전압 전기선과 접촉하는 것을 이와 유사한 은유로 들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고전압이 흐르는 전기선과 접촉한다면 견디지 못하고 바로 죽을 것입니다. 감히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그것을 볼 것이다" (5b절). 모세에게 거부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비전은 "모든 사람" 혹은 "모든 육신"에게 허용될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더라면 죽었을 것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살 것이라는 것이다. 그 비전은 유대인들, 혹은 모세와 같은 위대하고 경건한 지도자들, 테레사 수녀와 같은 위대한 성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일반인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종말론적 비전이 될 것이라고 제안한다. 즉, 마지막 날에만 허락될 비전이다. 우리 모두가 종말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은 기록한다:
-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개역개정)
For he himself is our peace, who has made the two one and has destroyed the barrier, the dividing wall of hostility, (NIV) - 그리스도를 통해 평안을 누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마치 둘 사이에 벽이 가로놓여 있는 것 같았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심으로써 그 미움의 벽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쉬운성경)
이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개역개정의 의미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아 쉬운성경을 참조합니다. 성경은 계속 설명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갈 3:28). 그 이유는 평화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둘 사이를 가르던 벽이 어린양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그 미움의 벽이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죄인에게 허락하신 놀라운 은혜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다” (5c절). 이 일이 분명히 일어날 것이다. 여호와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그의 말씀은 성취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여호와의 말은 믿을 수 있다. 여호와는 약속을 지키신다. 그가 아브람에게 훨씬 이전에 한 언약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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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The voice of one saying, “Cry!” One said, “What shall I cry?” “All flesh is like grass, and all its glory is like the flower of the field.
7. The grass withers, the flower fades, because Yahweh’s breath blows on it. Surely the people are like grass.
8. The grass withers, the flower fades; but the word of our God stands forever.”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6. 한 소리가 말한다. '외쳐라!' 그래서 '내가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의 모든 영광은 들의 꽃과도 같다.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여호와의 입김이 그 위에 불기 때문이다. 정말로 이 백성은 풀과도 같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여기서도 화자와 청자는 누구인지 모릅니다. 주문은 '외쳐라!' 한 마디입니다. 청자로 보이는 사람이 묻습니다.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 화자가 하나님이실까요? 청자가 외칠 말을 화자로 보이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의 모든 영광은 들의 꽃과도 같다” (6b절). 사람들이 양을 사육하는 목축 경제에서 풀은 귀중하다. 양은 먹어야 하고 그들이 먹는 것은 풀이다. 양의 풀을 구하지 못하는 목동은 양 떼와 생계를 잃을 수밖에 없다. 양치기는 좋은 풀을 보는 안목을 기른다. 이렇게 건조한 기후에서는 풀이 금방 바싹 마르고 갈색이 되어 양에게는 좋지 않은 먹이가 될 것이다. 양치기는 녹색 풀이나 갈색 풀 중에서 아직 녹색 기미가 남아 있는 풀을 찾을 것이다.
풀처럼 꽃은 약하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 허약함에 대하여 말한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오늘날 존재하는 들판의 풀을 그렇게 입히고, 내일은 오븐에 던져진다면, 믿음이 적은 여러분, 더 많은 옷을 입히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6:30)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여호와의 입김이 그 위에 불기 때문이다" (7a절). 목자는 사막에서 발원하여 방목지를 가로질러 부는 뜨겁고 건조한 먼지투성이의 시로코 바람에 익숙할 것이다. 이 바람은 초목에 매우 파괴적이다. 건조한 바람은 식물의 수분을 빨아들이고 뜨거운 온도는 식물을 바싹 마르게 한다. 농업에 의존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바람을 두려워하는데, 덥고 건조한 바람이 매시간 불어대면서 불행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식물과 동물에게 큰 불행을 초래하는 바람도 이러한데 '여호와의 입김'이나 '여호와의 영'이 그 위에 분다면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정말로 이 백성은 풀과도 같다” (7b절). 이제 은유가 더 명백해졌다. 우리는 시로코 바람에 시드는 풀과 꽃에서 배울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 자신의 덧없음, 즉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상기시킨다. 풀과 꽃이 잠시 번성하다가 시로코 바람에 시들어 죽듯이 우리도 잠시 번성하다가 시들어 죽는다.
만약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해당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해당된다. 그들은 여호와를 위해 충실한 삶을 살 때 번창했지만, 그들은 부족한 믿음으로 인해 문제에 부딪쳤다. 풀과 꽃처럼, 그들은 번창하고 또 규칙적으로 죽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8절). 풀과 꽃처럼 인간은 시들고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루 종일 의지할 수 있는 불변의 진리이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다윗의 자손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서약하셨다. 이 망명자들은 그들의 자손이며, 그들은 그들의 원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지키실 것을 소망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희망적인 메시지이다. 우리는 또 하나님을 실망시키겠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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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You who tell good news to Zion, go up on a high mountain. You who tell good news to Jerusalem, lift up your voice with strength. Lift it up. Don’t be afraid. Say to the cities of Judah, “Behold, your God!”
10. Behold, the Lord Yahweh will come as a mighty one, and his arm will rule for him. Behold, his reward is with him, and his recompense before him.
11. He will feed his flock like a shepherd. He will gather the lambs in his arm, and carry them in his bosom. He will gently lead those who have their young.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9. 좋은 소식을 전하는 너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오르라. 좋은 소식을 전하는 너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힘껏 높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보아라, 너희의 하나님이시다!' 말하라. 10. 보아라, 주 여호와께서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다.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다. 보아라, 그가 주실 상이 그에게 있고, 그의 보상이 그의 앞에 있다. 11. 그는 목자와 같이 그의 양 떼를 먹이시고, 그의 팔에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신다. 새끼들이 있는 어미 양들을 온순히 인도하실 것이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너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오르라. 좋은 소식을 전하는 너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힘껏 높여라" (9a절). 시온은 요새란 뜻의 예루살렘 성이 세워진 산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시온'은 예루살렘,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성경에는 늘 '높은 산'으로 묘사되는데 해발 약 790m의 낮은 언덕 같은 산입니다. 예언자는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시온 산즉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할 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높다는 의미보다는 영적으로 우리가 올라야 하는 상징적인 성지로 이해하면 될 듯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높여라” (9b절). 주님이 책임자이시니 당황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그가 하겠다고 말한 것을 꼭 이루신다.
“유다의 성읍들에게 '보아라, 너희의 하나님이시다!' 말하라!” (9c절). 이 메시지의 청중은 '유다의 성읍들'이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바벨론에 추방되어 있고, 그들은 거의 50년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고 있고, 그것이 언제 끝날지 궁금해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던 4백 년과 비교하면 50년은 그리 길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50년은 평생이다. 평생을 종노릇하며 사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사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있을까?
“보아라, 너희의 하나님이시다!” 이 메시지는 하나님이 돌아오셨다는 것, 즉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이다. 그들의 처벌은 끝났고 그들의 노예생활은 끝이 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메시지는 하나님이 그들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들의 도시와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라는 메시지이다.
“보아라, 주 여호와께서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다.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다” (10a절). '보아라'를 두 번 사용하여 청자의 주의를 기울이도록 강조한다. 이 두 개의 평행한 구절 모두 하나님이 가진 힘을 강조한다. 팔은 힘의 상징이다. 이곳의 이미지는 군대의 이미지이며, 주님은 전투를 치르며 반대진영을 제압하고 있다.
이 구절의 이 부분부터, 우리는 (1) 주님이 힘을 가지고 오고 계시고 (3) 권세로 지배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그것이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반대자들이 하는 일은 아무 것도 되지 않을 것이다.
“보아라, 그가 주실 상이 그에게 있고, 그의 보상이 그의 앞에 있다” (10c절). 이 두 문구 모두 보상만을 강조한다. 문제는 보상이 망명자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이다. 둘 중 하나일 수도 있다.
만약 망명자들이 보상을 받게 된다면, 그들의 보상은 노예에서 해방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보상을 받게 된다면, 그의 보상은 망명자들, 즉 그의 백성들, 그의 자녀들이 될 것이다. 한때 길을 잃었지만, 지금 그들을 찾았다. 그것은 대단한 보상이다.
“그는 목자와 같이 그의 양 떼를 먹이시고” (11a절). 이 구절의 세 부분은 각각 그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보살핌을 강조한다. 그는 그들을 목자와 같이 먹일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시 23:2).
“그의 팔에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신다” (11b절). 10b절에서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다"와 11b절에서 "그의 팔에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신다"의 대조적인 용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칼을 휘두르는 강한 팔은 온화함과 동정심 또한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양들은 어린 아이들처럼 빨리 걷거나 멀리 걷지 못한다. 양 떼가 움직이면, 그들의 작은 다리는 빠르게 마모된다. 아무도 그들을 돕지 않는다면, 그들은 무리에서 길을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목자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양들을 모으고 이동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분이 하는 일이다. 지친 새끼양 한 마리가 목자의 가슴 옆에 있는 목자의 강한 품에 안겨 운반되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될지 상상하기 바란다!
성경학자의 평을 읽으니 같은 '하나님의 팔'인데 하나는 칼을 휘두르는 강한 팔, 다른 하나는 품에 안으시는 온화하고 자비가 있는 팔을, 즉 힘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길을 헤매다 지친 새끼 양 한 마리, 그리고 그 양 옆 있는 목자의 강하고 부드러운 품에 안겨 운반되는 정적이고 동시에 동적인 하나님의 움직임을 보는 듯합니다.
“새끼들이 있는 어미 양들을 온순히 인도하실 것이다” (11c절). 어미 양은 자기 새끼를 걱정하고 자기 가까이에 새끼 양을 두고 싶어 할 것이다. 목자가 새끼 양을 들어 팔에 안고 갈 때 어미 양이 가까이 따라올 것이고, 어미는 목자를 알고 있기 때문에 새끼 양을 걱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목자가 수행하는 가장 부드러운 리더십은 어미 양을 품에 안고 이끌어 주는 것이다.
말씀의 내용이 오묘하고 마치 한 편의 시와도 같습니다. 감히 주석을 달지 못해 성경학자의 설명을 기본으로 공부해서 올립니다.
BIBLIOGRAPHY:
https://sermonwriter.com/biblical-commentary-old/isaiah-401-11-commentary/
https://enduringword.com/bible-commentary/isaiah-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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